국방부는 북한과 고위급 접촉에서 합의한 대로 확성기를 통한 대북 심리전 방송을 어제 정오 중단했다. 북한의 지뢰 도발에 맞서 10일 방송을 재개한 지 보름 만이다. 이에 맞춰 북은 준전시상태를 해제했다. 남북이 남북대화에 전격 합의하면서 긴장이 완화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북이 합의를 실천하기 전까지는 속단해서는 안 된다.
북한 측 대표였던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조선중앙TV에 출연해 “이번 긴급 접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이 심각한 교훈을 찾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내부용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사태를 심각하게 호도하는 망언이다. 이러니 북은 최종적으로 이뤄지는 실제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북이 어제 발표한 6개항의 공동보도문에도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이 저지른 지뢰 도발에 대해 ‘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북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협상 가이드라인으로 강조했던 ‘확실한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어제 “북한이 자신들의 도발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것이 앞으로 남북 간 신뢰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평가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가 강조해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공동보도문 1항에 가장 중요한 지뢰 도발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고 ‘앞으로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은 협상에서 대북 확성기 시설의 철거와 방송 영구 중단을 요구했지만 우리는 이를 거부하고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언제든 방송을 재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북한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들이 두려워하는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 것은 북의 도발에 이은 협상, 남측의 보상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부의 위기관리 방법을 답습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악순환을 끊을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들은 실망스럽다.
협상에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100% 우리 뜻만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북의 마지못한 유감 표명을 사과로 받아들이는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기보다는 김정은이 합의를 반드시 실천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남북이 추석을 맞아 갖기로 한 이산가족 상봉부터 반드시 실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북은 이산가족 상봉 합의도 몇 번 깬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5·24 대북 제재조치 해제, 금강산 관광 재개, 심지어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점치지만 관계 개선에는 순서가 있다. 이번 협상에서 북측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운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측 대표인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에 돌아와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이번에 북은 잠수함, 공기부양정, 특수전 부대를 대거 가동하는 등 전시 상황이 되면 어떤 작전으로 나설지 노출했다. 이를 면밀히 분석해 우리 측 대응 태세를 점검하고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남북관계에서는 돌다리를 거듭 두드려 보는 냉철한 접근이 필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