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아무것도 못하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3일 03시 00분


하태원 정치부 차장
하태원 정치부 차장
북한이 목함지뢰 도발에 이어 대북 확성기를 겨냥해 포탄을 날렸던 8월 말 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전직 부총리와 장관급 인사, 박근혜 캠프 참여자(외교안보 및 경제), 2012년 대선의 야권 후보 진영 ‘브레인’, 국회의원, 유수 대학의 원로 교수, 전직 재외공관 무관(武官) 등이 모였다.

자연스레 북한의 도발이 화두가 됐다. “북한이 두 발(당시엔 두 발로 알려졌지만 추후 네 발로 확인)이나 포탄을 쏜 것은 우리 군 당국이 ‘절대로’ 원점타격을 못할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란 주장이 나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1973년 백골부대의 전설로 불리는 ‘박정인의 보복’ 이후 화끈한 북한 응징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때는 공대지(空對地) 미사일도 장착하지 않은 F-15K가 연평도 상공을 ‘시험비행’하듯 날았을 뿐이다. 빈총 들고 전투에 나선 격 아닌가.

도발적 문제 제기는 급속히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 논쟁으로 옮아갔다. 과연 이 나라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필수적인 국가적 어젠다를 속도감 있게 추진할 역량을 갖췄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야속할 수도 있다. “저거 뭐꼬? 치아뿌라”라는 한마디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어 버리고 하루아침에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선언했던 제왕적 대통령(김영삼)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일자리 만들고 경제 좀 살려보겠다며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관광진흥법 등 ‘3법’만이라도 제발 통과시켜 달라는 읍소를 했지만 국회는 3년 가까이 대답 없는 메아리다. 여권 고위 인사는 “가만히 있다가도 청와대가 중점 법안이라고 하면 ‘죽어도 안 된다’며 어깃장을 놓는 게 대한민국 야당”이라고 푸념했다.

17대 이후 10년째 국회에 갇혀 있는 북한인권법은 여야 대표가 직접 나서 통과를 공언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외교통일위원회 간사의 ‘신념’에 막혀 미아(迷兒) 신세다.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간첩은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우리 정보기관은 눈과 귀가 가려진 지 오래다. 문제를 알고도 풀지 못하는 무기력이요, 집권 여당의 무능력이라고 본다.

야당은 ‘소수 야당 결재법’이 된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 사사건건 정파적 이익을 관철할 연계 전략만 고민하는 사람들 같다. 느닷없이 특수활동비 문제를 따져보겠다며 오래전에 합의한 본회의 의사일정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산시켜 버리는 식이라면 신뢰 회복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대한민국을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정치권이 천지개벽의 각오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정당한 절차(due process)를 존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혼란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민의라는 정당성을 대변하는 입법 권력이 청와대와 행정 권력을 견제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명확한 국가적 비전 속에 약진하는 이웃나라의 모습이 선명하다. 대륙굴기의 의지를 만천하에 공개 선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당장이라도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시킬 기세다. 잃어버린 10년에 이은 ‘불임정치’의 치욕을 씻겠다는 아베 신조가 장기 집권의 기틀을 다진 동력도 “뭔가 해낼 줄 아는 총리”에 대한 일본인의 믿음이라고 한다.

정치적 여건이 어떻든 대통령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국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일을 관철해 내는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주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에서 실기할 경우 최종 책임은 결국 박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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