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왕복 4차로 도로. 1차로를 달리는 승용차 운전자 시야에 어린이 보호구역 표지가 들어왔다. 잠시 후 한 어린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나 차량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이어 옆 차로에 경광등을 켜고 서 있는 노란색 통학차량에서 어린이들이 내리는 모습도 확인됐다. ‘어린이 보호’라고 적힌 통학차량에는 빨간색 ‘STOP’(정지) 표시가 선명했다. 그러나 승용차는 멈추기는커녕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쳐 갔다. 통학차량을 추월하자마자 뒤편 횡단보도에서 어린이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린이가 놀라 멈추지 않았다면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다. 그런데도 운전자는 차를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계속 내달렸다.
이 장면은 실제 상황이 아니다. 현재 실시 중인 운전면허 학과시험에 출제되는 동영상 문항(699번) 가운데 하나다. 동영상 문항은 2010년 컴퓨터 학과시험이 도입될 때 만들어졌다. 응시자가 실제 운전자 시각으로 제작된 주행 영상을 보며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동영상 내용이 ‘법 위반’을 전제로 만들어져 오히려 잘못된 운전 습관을 조장한다는 지적이다. 699번 동영상의 경우 주행 중 위험 요인을 찾아내는 것. 정답은 ‘통학차량에서 내린 어린이’지만, 정작 동영상 속 운전자는 교통법규를 밥 먹듯이 어기고 있는 것이다.
본보 ‘시동 켜! 착한운전’ 취재팀이 전문가에게 자문해 운전면허 학과시험용 문제은행에 수록된 735개 문항(1종 보통)을 검토한 결과 질문 취지와 상관없이 불법 운전을 조장할 수 있는 문제가 여럿 있었다. 699번 문제는 올해 1월부터 시행 중인 개정 도로교통법(세림이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통학차량이 경광등을 켜고 어린이가 승하차 중일 땐 뒤따르는 차량뿐 아니라 옆 차로 차량도 일시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아는 운전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달 28일 경기 평택시에서 통학차량을 추월한 승용차에 8세 어린이가 치여 숨졌다. 해당 문항을 검토한 허억 가천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초보 운전자에게 통학차량을 보고도 지나쳐도 된다는 인식을 줄까 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동영상 문항(688번)에서는 도심 교차로를 통과한 운전자가 적색신호를 보고도 그대로 달린다. 국도를 달리다 과속단속카메라를 발견한 앞 차량이 감속하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추월까지 한다(692번). 시험 출제와 관리를 맡은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운전자가 불법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운전자가 법규를 위반하고 있다’는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주행 영상을 보고 위험 요인을 찾아내는 위험인지시험(HPT·Hazard Perception Test)은 영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 중이다. 그러나 교통법규를 꼼꼼하게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위험 요인을 찾는 문제로 구성됐다. 안주석 국회 교통안전포럼 사무처장은 “위험인지시험은 운전자가 법규를 모두 준수해도 위험한 상황이 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시험”이라고 말했다.
3일부터 새로 학과시험에 반영된 난폭 운전과 보복 운전 관련 문항은 시작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신설된 20개 문항 중 3번은 ‘난폭 운전을 방지하기 위한 운전자의 태도 중 올바르지 않은 것’을 묻는다. 그러면서 양보 습관, 준법 운전, 배려 운전, 교통법규 위반을 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초등학생도 한 번 읽으면 알 정도로 정답이 뻔한 문제가 3, 4개에 달한다. 반대로 실제 운전 상황과 관련 없는 전문적인 연구 내용을 담은 문제도 추가됐다. 정작 보복 운전을 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에 대한 문제는 빠졌다. ‘졸속 출제’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난폭 운전이나 보복 운전에 따르는 불이익이나 처벌 방법을 출제해 경각심을 줘야 하는데 너무 쉽게 출제돼 교육 효과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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