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베이징(北京) 차오양(朝陽) 구에 있는 화마오톈디(華貿天地) 백화점. 출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고, 위에 달려 있던 간판도 뜯겨 있었다. 아파트, 마트 등이 함께 개발돼 2012년 4월에 문을 연 이 백화점은 3년도 안 돼 최근 문을 닫았다. 쇼핑몰 인근 부동산관리회사 ‘홈링크’의 겅쉐(耿雪) 씨는 “건물이 몇 달째 텅 비어 있는데 아직 불황 때문에 새 입주업체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증시 폭락은 ‘차이나 쇼크’의 극히 일부만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위기의 진짜 본질은 생산과 수출, 투자, 소비에 이르는 중국의 실물경제 전반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발 위기가 금융 부문에 그치지 않고 실물 부문으로 확산되면 대외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여러 경로를 통해 오랜 기간 강도 높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 경제는 현재 제조업 위주에서 서비스업으로, 수출의존형에서 내수주도형으로 구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의 불안이 장기적으로 진행될 문제이므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장기적인 관점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 흔들리는 ‘세계의 공장’
둥관(東莞) 시는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광둥(廣東) 성 내에서도 ‘제조업 1번지’로 불려왔다. 풍부한 인력을 이용해 전자제품과 의류 가구 신발 등을 생산하는 이곳은 “둥관에서 차가 막히면 전 세계에 물건이 부족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장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동아일보 취재팀이 1일 둥관을 찾았을 때는 폐허가 된 공장용지들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서 전자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쑹(宋)모 사장은 “주요 납품처인 외국 기업들도 중국에서 짐을 싸고 있다”며 “인건비, 임차료, 원료비는 두 배로 올랐는데 매출은 하루가 다르게 푹푹 떨어지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국적 기업이나 중국 업체들의 폐업과 철수, 야반도주는 이제 둥관 시뿐만 아니라 웬만한 중국의 다른 제조업 공단에서도 흔한 일이다.
이처럼 중국 제조업이 무너지는 주된 원인은 과잉 투자와 임금 상승이다. 기업들이 과거 고성장기에 무리해서 설비투자를 늘리고 정부도 내수 진작을 위해 근로자의 최저임금을 계속 올렸던 게 요즘 같은 글로벌 경기침체기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건은 팔리지 않는데 생산량은 그대로니 기업들은 빚과 재고만 잔뜩 쌓이고 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부채 비율은 2008년 98%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156%까지 올랐다. 리웨이(李偉) 청쿵(長江)상학원(CKGSB) 경제학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4조 위안(약 750조 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으로 대규모 부동산 개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이뤄지면서 중국 경제는 고속 성장을 했다”며 “하지만 대량 부채가 후유증으로 남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실물경제의 위기는 경제지표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 7월 중국의 수출·수입은 모두 1년 전보다 8% 이상 급감했고 8월 제조업지수는 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1990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7% 아래로 내려갈 게 확실시된다. 내년에는 6%대 중반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자동차, 시계, 명품 등의 내수 시장도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중국 최대 백화점그룹인 완다(萬達)는 점포 90여 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0여 곳을 정리할 계획이다.
○ 중국발 위기, 세계 각지에 무차별 확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미국의 금융 완화 정책과 중국의 경기부양책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의존해 굴러갔다. 그런데 올해 말 미국이 7년 만에 금리를 올릴 채비를 하고, 동시에 중국 경기도 눈에 띄게 냉각되면서 세계 경제는 두 바퀴가 한꺼번에 삐걱거리는 큰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번 금융 불안이 ‘신창타이(新常態·뉴노멀)’라는 경제 구조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통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 증시 폭락의 대응 과정에서 신뢰를 잃은 중국 정부가 과다 부채와 공급 과잉, 그림자 금융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면서 경제 연착륙을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중국의 경제위기는 이미 세계 각국에 빠르게 옮겨붙고 있다. ‘자원 부국(富國)’인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중국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은 화폐가치가 급락하면서 외환위기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들도 중국과 신흥시장의 경제 불안으로 대외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등 실물 부문에서 ‘도미노 충격’을 받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이번 중국발 쇼크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1∼2012년 유로존 재정위기에 이은 ‘글로벌 3차 위기’의 서막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중국 경제의 위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복합불황 성격의 장기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도 충분히 대비하지 않으면 ‘경제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인건비 상승 감당못해 베트남으로… 광둥성 진출기업 30% ‘떠날 준비’ ▼
위기 내몰리는 한국기업들
중국 광둥(廣東) 성 둥관(東莞) 시 랴오부(寮步) 진의 아남전자 공장은 내년 상반기(1~6월) 중에 베트남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2일 찾은 아남전자 공장의 경비원은 “지금은 남은 주문을 처리하는 상황”이라며 “근로자 1000명 가운데 떠나는 근로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제조업 환경이 악화되고 경기가 둔화되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 현지에 공장을 둔 기업들은 인건비 상승으로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13억 내수 시장을 겨냥한 기업들도 중국 내 소비가 위축된 데다 급성장한 중국 로컬 업체와의 경쟁으로 고전하고 있다.
둥관에서는 삼성전기 둥관법인의 파워모듈 부문이 9월부터 별도 법인으로 분사되면서 협력업체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협력업체 대표는 “결국엔 삼성전기가 둥관에서 발을 빼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돈다”며 “인건비 상승으로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 앞으로 3년 내에 둥관의 한국 기업 30% 이상이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둥관 지역에서 철수하는 한국 기업이 늘면서 한때 120곳에 이르던 둥관한인상공회 회원사는 현재 70여 곳으로 줄었다. 한국 기업의 천국으로 불리던 산둥(山東) 성에도 한때 한국 기업 1만 개가 진출했지만 지금은 절반 수준인 4800여 곳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내수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들의 입지도 불안하다. 지난해 초까지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고수한 삼성전자는 올해 6월 말 현재 샤오미, 화웨이, VIVO 등 중국 업체에 밀려 5위까지 떨어졌다. 현대·기아차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중국 판매량은 9만6154대로 지난해 8월보다 26.6% 줄었다. 건설 경기 둔화와 중국 저가 업체의 공세로 현대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등 한국 굴착기 업체의 중국 내 시장점유율도 10년 전 40%에서 지난해 12%로 급락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 유통 기업들도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과 현지화 실패로 고전하고 있다.
중국 경기 둔화로 한국경제의 버팀목인 수출도 어려워지고 있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8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중국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7.6% 줄었다. 중국의 수요가 줄어들고 중국 현지의 제조업 자급률이 상승하면서 중간재·소재 수출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오재호 코트라 광저우무역관장은 “예전에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겠다고 하면 중국 지방정부에서 공항까지 나와 영접했는데 지금은 ‘뭐 하는 회사냐’부터 묻는다”라며 “이제 중국에 진출하려면 정밀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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