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나중에 배임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이사회 출석 여부를 묻는 담당자에게 ‘해외출장을 가서 연락이 안 된다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지낸 적이 있는, 현 정부의 한 장관급 공직자가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사회에 참석하는 사외이사가 이 정도이고, 일상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기업오너나 사내이사가 느끼는 공포는 훨씬 크다.
배임죄에 대한 공포는, 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는 일부 기업인의 해사(害社) 행위를 예방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투자의욕을 꺾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양면이 모두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는 후자의 측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배임죄 규정을 갖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배임’이라는 말은 있지만 ‘배임죄’라는 용어는 없다. 배임을 당사자 간에 풀어야 할 민사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없더라도 배임죄로 ‘걸어서 잡아넣을 수 있게’ 돼 있는 나라는 한국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우리 형법의 배임죄는 문구상 일본의 형법을 베낀 것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 형법에서는 배임죄의 성립 요건으로 ‘자기 또는 제삼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또는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으로’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만, 우리 형법에는 이런 문구가 없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배임죄 그물을 너무 넓게 치려다 보니 법조문이 애매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많다. 이코노믹리뷰라는 잡지가 2013년 2월 교수와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82.7%가 “배임죄의 범죄성립 판단기준이 애매하다”고 지적했다.
배임죄 조항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도 양산된다. 2005∼2008년 우리나라의 무죄율은 1.2%인 데 비해 배임죄의 무죄율은 5.1%에 이른다. 더구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의 무죄율은 11.6%로 평균의 10배에 육박한다. 외국에서는 전혀 죄가 되지 않는 일로, 한국의 기업인들은 수사기관 조사실과 재판정 문턱을 수도 없이 들락거려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기업의 신용도는 땅에 떨어지고, 경영은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다. 하소연할 곳도 보상받을 곳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경제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인 ‘기업가정신’이 싹트려고 해도 싹틀 길이 없다.
글로벌 경제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기업경영 환경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불확실성과 위험(risk)의 증대다. 노키아처럼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기업들도 의사결정이 경쟁 기업에 한발만 뒤처지면 한순간에 패망하는 것이 글로벌 경쟁의 현주소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마침 국회 부의장인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지난달 말 배임죄의 조항을 일부 손보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개정안은 배임죄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고의성이 있을 때만 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게 하자는, 온건하고 타당한 내용이다. 배임죄 규정이 기업가정신과 건전하게 동행할 수 있도록 과유불급의 문제점을 이 기회에 꼭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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