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일선 기자로 법원을 취재하던 때였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판결문 초고 더미를 뒤지며 기삿거리를 찾다가 언뜻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숨겨진 진짜 변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판결문에 드러나지 않은, 판사의 개인적인 환경이나 관심사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실례로 자녀가 아들뿐인 판사보다 딸을 둔 판사가 성범죄에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한다는 외국의 연구 결과도 있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로 ‘여성 피고인이 예쁘면 봐줄까’라는 가설을 따져 보기로 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법원에 남성 판사들이 압도적으로 많던 시절이었다. 최소한 100명의 남성 판사를 면접 조사해 이 가설을 검증하는 기사를 써 보리라 마음먹었다. 판사들에게 설문지를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한 명씩 한 명씩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야심 찬 프로젝트는 채 10명도 만나 보기 전에 접어야 했다. 만나 본 판사들마다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판사들은 “법정에 선 여성 피고인 중에 예쁜 사람은 없다”고 한결같이 얘기했다. 어떤 판사는 농담조로 “예쁘면 검사가 기소도 안 하고 봐줬을 테니 미인은 법정에 설 기회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예쁘다는 건 타고난 것보다 가꿀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건데, 집안 환경 좋은 여성이 죄 지을 일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법원 안팎에서는 전관(前官) 출신이거나 판사와 연줄이 닿는 변호사를 선임해 봐주기 판결을 받아냈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퇴직 1년 전 근무했던 곳의 사건은 아예 수임을 못하도록 변호사법이 개정됐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올해 8월부터 국내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연줄 있는 변호사가 선임되면 재판부를 재배당하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하고 있다.
대법원 역시 형사사건 성공보수를 금지하는 새로운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놓았고,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 상고심 재판을 맡은 주심 대법관이 박 의원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사건을 재배당했다.
전관예우 관행과 연줄 판결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이전까지는 법원 바깥의 변호사들에게 ‘수임 제한’ 법 조항을 따르라는 식의 타율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반면 지금은 법원 스스로 사건 재배당을 통해 이전의 잘못된 관행이 설 자리가 없게 하려는, 가히 소탕작전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능동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둘째 사위의 마약 투약사건 1심 재판 역시 이런 범주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우울한 이야기다. 재판장과 변호인이 고교 동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봐주기’ 의혹의 심증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이 변호인은 마약사건을 처음 맡은 것이었다고 한다. 마약사건 전문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걸 보면 변론 실력보다는 재판장과의 학연을 활용해 어떻게든 1심에서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서울중앙지법의 방침대로라면 마땅히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됐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나저나 김 대표 사위 사건이 본보에 처음 보도되면서 새누리당 내에선 친박 핵심인사가 언론플레이를 했네, 야당의 모 의원이 정보를 줬네 등의 온갖 억측과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음모론을 떠드는 것 자체가 국민의 눈을 흐리려는 저급하고 불순한 것이다. 국민에게 예뻐 보여야 앞날에 좋은 일도 생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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