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2015 육아전쟁… 新種 기러기 출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일 03시 00분


[2015 육아전쟁 ‘新기러기 시대’]

기러기 부부.

자녀 교육 등을 위해 떨어져 사는 부부를 칭하는 말이다.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2000년대 초, 영어 교육을 위해 아내와 자녀만 외국으로 나가고 남편은 한국에서 사는 사례가 많아지면서부터다. 2002년 국립국어원은 이를 신조어 사전에 등재했다.

2012년부터 정부 부처가 세종시로, 산하 기관들이 각 지역의 혁신도시 등으로 이주하면서 ‘국내판’ 기러기 부부가 더 늘었다. 여기에 최근 맞벌이 부부가 영유아 자녀의 육아 때문에 기러기 부부로 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워킹맘 김모 씨(33)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 씨는 남편 오모 씨(38)와 서울에 함께 있으면서도 주말에만 같이 지낸다. 김 씨는 8월 초부터 주중엔 20개월 된 딸 소영이(가명)와 친정 부모의 집에서, 오 씨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 산다. 아이의 육아를 맡아주던 부모의 집에 김 씨가 아예 들어가 버린 것. 또 다른 워킹맘 주모 씨(38)도 네 살 난 딸의 육아를 맡아주는 부모의 집에서 일주일에 2, 3일 정도 지낸다고 한다. 주 씨는 “퇴근해서 부모님 집에 왔을 때 아이가 자고 있으면 함께 자곤 한다”고 말했다.

여성 공무원 차모 씨(41)는 다섯 살 난 아들과 세종시에 거주한다.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함께 내려오지 못했다. 그런데 차 씨가 워킹맘이다 보니 아들의 육아를 위해 친정 엄마가 세종시에서 함께 지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차 씨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혼자 산다. 세종시 이주와 육아로 인해 두 세대 모두 ‘기러기 부부’로 살게 된 셈. 차 씨는 “매주 금요일마다 기차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러기 장모’와 세종으로 오는 ‘기러기 사위’가 조우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기러기 부부의 중심엔 자녀가 있다. 과거엔 학령기 자녀의 교육에서 비롯됐다면, 신(新)기러기 부부는 어린 자녀의 육아에 기인한다. 자녀가 태어남으로써 가족이 완성된다고 하는데, 왜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걸까.  
▼ 아기는 외가에, 아내도 친정에… 주말에 한번씩 만나요 ▼

워킹맘 김모 씨(33)는 남편 오모 씨(38)와 서울에 함께 살면서도 주말에만 같이 지낸다. 김 씨는 주중에 20개월 된 딸 소영이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인 친정집에 있고, 남편 오 씨는 혼자 산다. 이들은 왜 ‘기러기 부부’가 된 것일까.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3월부터 김 씨 집에선 아침마다 ‘007작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오전 6시 50분 김 씨가 일어나면 그 자리에 친정 엄마 이모 씨(60)가 조용히 들어와서 눕는다. 옆엔 소영이가 자고 있다. 엄마가 곁에 없으면 잠을 푹 자지 못하는 소영이 때문에 출근 준비를 하는 김 씨 대신 ‘엄마의 대체’인 이 씨가 옆에 눕는 것이다.

매일 오전 6시 20분에 일어나 세수도 못한 채 부랴부랴 딸네 집에 온다는 이 씨. 그렇게 5개월여를 살았더니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다. 소영이가 일어나면 이 씨가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고, 딸인 김 씨가 퇴근하면서 데리러 왔다. 물론 딸도 피곤하다는 건 잘 알지만 야속할 때가 많다.

그러던 8월 초 아침, 엄마가 평소보다 20분 정도 늦게 갔더니 딸이 “엄마 때문에 지각하게 생겼다”며 짜증을 냈다. 엄마는 욱하는 감정에 “더 이상 피곤해서 못하겠다”며 “평일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주말에만 데려가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워킹맘 김 씨, “남편이 얄미워”

김 씨는 엄마의 반응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일하는 엄마는 갑을 관계에서 을도 아닌 병, 정이라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버지도 “너희 엄마가 힘들어하는 걸 더 이상 못 보겠다”며 합세하고 나섰다. 며칠 후 친정 부모는 소영이의 짐을 다 싸서 가져갔다.

‘퇴근 뒤 짧게라도 아이와 놀아주고, 잠은 꼭 같이 자야 아이의 정서에 좋다던데.’ 한참을 고민하던 김 씨의 머릿속에 ‘나도 친정에 들어가 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솔직히 퇴근 때마다 친정에 들러 아이를 데려오는 것도 피곤했다. 남편도 올 초부터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다며 거의 매일 야근이다.

친정에서 사는 건 생각보다 쉽다. 결혼 전 지내던 방에서 예전에 쓰던 침대와 옷장, 화장대 등을 고스란히 다시 사용하기 때문이다. 옷 몇 벌과 세면도구, 화장품 등만 가져다 놓으면 됐다. 처음엔 일주일에 하루 이틀 가서 잤지만 이젠 5일 내내 친정에서 출퇴근을 한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지낸 지금, 삶 자체는 편안해졌다고 한다.

“친정 엄마가 아침과 저녁밥을 챙겨주니 좋죠. 야근을 하거나 저녁 약속이 있어 늦게 들어올 때도 예전보다 마음이 편해요. 하지만 새끼를 배 속에 넣은 채 친정 엄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간 캥거루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결혼은 했는데 독립은 못한 모습이 한심할 때도 있죠.”

김 씨는 처음엔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가 된 남편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남편이 장인, 장모가 아이 양육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 얄미운 감정이 든다. 예전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소영이 소식을 자주 묻더니 요즘은 그마저도 뜸하다.

남편 오 씨, “야근은 맘 편히 할 수 있지만…”

“소영이랑 둘이 친정에 들어가 살겠다고?”

김 씨의 남편 오 씨는 기가 막혔다. ‘소영이가 태어난 이후 아내가 아이만 생각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자신이 황당해하자 아내는 한술 더 떠 “그냥 친정이랑 살림을 합치자”고 했다. 오 씨는 졸지에 ‘기러기 생활을 하느냐, 처가살이를 하느냐’ 고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결국 그는 기러기 생활을 택했다. 처가살이가 싫다기보다는 살림을 합치는 건 전셋집 처분, 살림 정리 등 너무 일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아내도 친정에 자신과 소영이만 들어가 살고 싶어 하는 눈치다. 또 아이가 자랄 동안만 잠시 떨어져 살면 된다고 생각하니 ‘할 만하겠다’ 싶었다. 솔직히 이 일로 지나치게 아내의 신경을 건드리다가 혹여 회사를 그만둔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혼자 살게 된 뒤 처음엔 소영이가 보고 싶었고, 어쩌다 일찍 들어왔을 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땐 마음이 울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 씨는 아내와 처가에서 아이를 전적으로 봐주는 덕분에 요즘 마음 편하게 야근도 하고 종종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미혼인 회사 후배는 그를 보면서 “나도 ‘서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소영이가 5일 만에 만난 아빠를 낯설어한다는 게 아쉽지만, 주말에 잘 놀아주면 금방 괜찮아지니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요즘 아내와 다툼이 잦아졌다는 게 신경이 쓰인다. 오 씨는 아내가 주중에 자신이 무엇을 먹고 다니는지,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통 관심이 없는 게 섭섭하다. ‘예전엔 함께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SNS로 ‘요즘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하면 아내는 ‘그런데 요즘 소영이는 말이 엄청 늘었다’는 식으로 대꾸를 해요. 물론 제가 아이와 함께 살지 않으니 소식을 전해주려고 하는 마음은 알지만 대화가 항상 이렇다 보니 답답할 때가 많아요.”

주말에 같이 살지만 두 사람은 소영이와 놀아주느라 서로 진지한 말 한마디 건넬 시간이 없다고 했다. 특히 아내 김 씨가 딸을 재우다 함께 잠들어 버리는 일이 잦기 때문에 ‘치맥’ 한 번 같이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오 씨는 아내가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도 억울하다. ‘내가 말려도 고집을 피워서 처가에 들어가 놓고는 이젠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며 짜증을 내다니.’ 솔직히 주변에선 ‘부럽다’고 하지만 가을이 돼서 그런지 ‘외롭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아내와 툭하면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주말에 주중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친정 엄마, “딸 뒤치다꺼리 언제까지?”

자신의 폭탄선언 덕에 딸과 손녀가 집에 들어오긴 했지만, 이 씨의 마음은 요즘 편치 않다. 우선 딸과 살다 보니 육아며 생활 방식 등으로 소소하게 부딪치는 일이 많아졌다. 또 딸과 사위가 주말마다 육아 문제로 싸우는 것 같다. 사위도 처음엔 주중에도 얼굴을 비치더니만 이젠 금요일 밤 소영이를 데리러만 온다. 무엇보다 딸네 부부의 기러기 생활이 고착화될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사실 딸인 김 씨 부부는 지난해 가을, 이 씨가 사는 아파트단지로 이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세금이 부족해 매달 50만 원 정도 월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아파트단지에 살게 된 것이다. 이 씨는 다음번 이사 때 딸 부부를 무조건 옆에 살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부족한 전세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순간 이 씨의 머릿속에서 묘안이 떠올랐다.

‘매달 소영이 돌보는 명목으로 주는 용돈 100만 원에서 30만 원을 줄여서 월세에 보태라고 하면 되겠다. 휴, 그런데 난 언제까지 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걸까.’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육아#기러기#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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