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한국 외교사 명장면]국정원장도 몰랐던 DJ-김정일 회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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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현대 이익치 秘線이 주도… DJ “신빙성 있는지 잘 모르겠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도 비선(秘線)에서 그 논의를 시작했다. 1999년 12월 취임한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한 달여 뒤인 2000년 2월 3일 대통령 주례보고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듣는다.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 의사를 전해왔다는 것. 내용도 내용이지만 남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상회담 논의를 국정원장인 자신이 몰랐다는 게 임 전 원장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임 전 원장이 펴낸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그 전말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임 전 원장에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계 사업가 요시다 다케시(吉田孟) 씨로부터 북한이 정상회담 추진 의사가 있음을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이 정상회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해외에서 송호경 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접촉을 제의받았다는 말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제의가 신빙성이 있는지, 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임 전 원장에게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요시다 씨는 친북 일본인으로 1980년대 말부터 금강산 관광 사업 등 현대의 대북 사업을 주선하고 성사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임 전 원장은 얼마 뒤 이 전 회장을 만났다. 이 전 회장은 박 전 장관이 2000년 5, 6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도록 주선해 달라고 자신에게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런 요청을 받은 뒤 이 전 회장이 요시다 씨에게 부탁했고 요시다 씨가 2000년 1월 평양에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측근 두 사람에게 이런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요시다 씨는 2월 1일 서울에서 박 전 장관을 만나 그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전했다는 말도 했다.

이는 남북정상회담에 민간 기업인 현대가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 준다. 이 전 회장은 임 전 원장에게 현대가 금강산 관광, 서해안산업공단 건설, 경의선 철도 사업 등 대규모 대북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주선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 뒤 박 전 장관과 송호경은 2월 27일, 3월 9일, 4월 8일 싱가포르, 중국 베이징에서 세 차례에 걸쳐 접촉해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간 정상회담에 합의한다. 싱가포르에서의 첫 접촉이 이뤄진 3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남북은 4월 10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국정원장#김대중#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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