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된 아이를 오전 6시 반 도우미 집에 맡기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한 시간 걸리는 직장까지 늦지 않게 가려면 아기에게 느끼는 미안한 감정도 사치다. 직장에서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연차를 쓰거나 회식에 자주 빠지다 보니 알게 모르게 열외가 돼 간다. 그런데 설상가상 ‘시간이 일러 힘들다’며 도우미가 일을 관두겠다고 한다. 6년 전 배성혜 씨(33·서울 강서구)는 5년여간 다녔던 첫 직장을 육아 때문에 관뒀다. 새벽부터 아이를 맡기느라 전전긍긍하는 전쟁을 치른 지 1년쯤 됐을 때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회사 다니는 내내 뭘 위해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배 씨는 초등학생이 된 큰아들과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아들을 두고도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세븐일레븐 인사팀에서 하루 5시간 시간선택제 근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내에서는 시간선택제 근무자들을 ‘해피사원’이라고 부른다. 시간선택제가 아니었다면 일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배 씨는 이것이 꽤 그럴듯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배 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시간선택제 근무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이 시간선택제 근무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시간제 재취업으로 달라진 ‘경단녀’들의 삶
육아 때문에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겐 시간선택제 근무가 유일한 해법이자 기회였다. ‘경력단절 여성’(경단녀)들의 재취업 욕구는 크지만 근무시간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배 씨의 경우도 “재취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구직활동을 할 때도 육아를 병행해야 하니 전일제 공고는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말한다.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로 보낸 뒤 오전 10시까지 출근하면 되는 요즘은 새벽부터 아기 맡길 곳을 찾아 전전하던 때와 삶의 질 자체가 다르다.
여성가족부가 2013년 결혼·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 5854명을 대상으로 한 ‘경력단절 여성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출산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는 응답자는 전체 88%에 이른다. 특히 양육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81.4%가 ‘자녀 양육 또는 교육 문제가 해결됐다면 일자리를 지속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렇게 경력단절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만 연간 15조 원에 달한다.
이진아 스타벅스 발산역점 부점장(36)도 점장 승진을 눈앞에 둔 2012년 육아 문제로 퇴직한 경우다. 매장 영업 특성상 전일제 근무로는 이른 아침이나 야간 근무를 피할 수 없었다. 오픈을 맡을 땐 오전 6시 반까지 출근해야 했고 마감을 할 때는 자정이 돼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시댁의 도움으로 몇 달 버텨봤지만 결국 한계가 왔다. 2005년부터 바리스타로 근무하며 차곡차곡 쌓아올린 경력이 거기서 끝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3년 스타벅스의 시간선택제 근무인 ‘리턴맘 프로젝트’로 직장에 복귀한 이 씨는 현재 일과 육아를 모두 조화롭게 유지해 가고 있다. 오전 9시에 다섯 살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긴 뒤 10시 반까지 출근하고 오후 3시면 퇴근해 아이를 데려온다. 평일 방과후 활동도 직접 챙긴다. 그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을 활용해 일하는 것이라서 일과 육아가 아무 충돌 없이 병행된다”며 “일을 하면서도 아이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으며 안정감 있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된 게 무척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 시간선택제로 직장 연착륙하자 열정도 커져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출산과 육아 가능성이 높은 30∼34세 여성들은 임금보다도 근무시간 조정 가능성을 재취업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자연히 이 문제가 해결되자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안정적으로 직장에 자리 잡은 시간선택제 근무자들은 일에 대한 목표 의식과 동기가 한층 뚜렷해졌다. 김국향 씨(42·대전 서구)는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영양사, 조리사 자격증까지 갖춘 재원이었지만 출산과 함께 일에 대한 꿈을 접고 살았다. 하지만 지난해 시청에서 연 시간선택제 일자리 박람회를 통해 성심당 외식사업부에 취업하면서 다른 사람이 됐다.
그는 한 달 전부터 전일제로 전환해 근무하고 있다. 몸도 고되고 아이들 걱정도 되지만 일이 주는 성취감이 훨씬 크다. 김 씨는 “시간선택제 근무를 통해 아이들도 일하는 엄마에 대해 이해할 준비 시간을 가졌고 나 자신도 많은 걸 얻었다”며 “고객서비스 관련 자격증도 공부하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으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스타벅스는 올해부터 시간선택제 근무자 중 희망자를 전일제로 전환해주는 제도를 1년에 두 차례 정례화했다. 일, 가정 모두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자 자발적으로 근무 시간을 늘려 경력을 개발하려는 이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회사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김종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고용연구센터장은 “육아로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에게는 안정적인 직장, 자유로운 시간 활용을 보장해주는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가장 좋은 대안”이라며 “기업이 직무를 명확히 설정해주고 적합한 인재를 뽑아 쓴다면 근로자와 기업 모두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재취업 넘어 정규직-승진 이어지게 정책 지원” ▼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
“일터로 돌아온 경력단절 여성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업무가 아닙니다. 과거와 똑같이 일·가정의 양립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요.”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사진)은 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렇게 일을 그만둔 여성이 다시 돌아왔을 때 겪는 어려움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가정 양립이 되지 않는 근로 환경에서는 여성이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똑같은 이유로 다시 일터에서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여성의 일자리 정책에 대해선 4R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여성의 채용(Recruit)부터 경력 유지(Retention), 재취업(Restart), 대표성(Representation) 지니기(즉 관리자급으로 승진)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
일·가정 양립을 위해선 결국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근로자가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시간을 단축해서 근무) 제도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특히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는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이용자가 1116명, 이 중 남성은 84명에 불과하다. 김 장관은 “‘누가’가 아닌 ‘내가’ 이 같은 제도들을 쓴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쓰는 사람이 많으면 안 쓰는 사람이 이상해집니다. 이 같은 제도를 과감하게 쓰는 게 도움이 되죠. 즉 출산·육아기가 되면 일·가정 양립을 위해 누구나 거쳐 가는 코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여성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김 장관은 동아일보와 채널A가 3년째 주최하는 ‘리스타트 잡페어-다시 일하는 기쁨!’에 대해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애프터 리스타트’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진다면 행사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이 시간선택제 일자리 등을 통해 재취업을 하고, 다시 전일제 정규직이 되는 등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들을 뽑았더니 실적도 올라가고 기업 문화도 좋아졌음을 보여준다면 회사들도 경력단절 여성을 채용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