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어제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을 빚고 있는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확립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항행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 군함이 27일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의 인공섬 12해리 안쪽 해역으로 진입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 대한 공식 반응이다. 그것도 자발적이 아니라 기자들의 채근에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익명으로 마지못한 듯 입장을 내놓았고, 애써 균형을 맞추는 식이어서 내용도 애매모호하다.
남중국해 분쟁을 한 겹 들춰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는 미국 간의 파워 게임이 드러난다. 박근혜 정부가 동맹관계인 미국과, 경제와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우호관계를 넓혀가고 있는 중국 사이에서 선뜻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쉽지 않을 수는 있다. 청와대가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되 중국을 자극하지는 않는 답변에 고심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남중국해 지역은 우리 수출 물동량의 30%와 수입 에너지의 90%가 통과하는 해상교통로다. 한국의 이해관계가 달린 문제에 언제까지 어정쩡한 태도가 통할지 의문이다.
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우리는 중국이 국제 규범과 법을 준수하기를 원하며, 만약 중국이 그런 면에서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요청했고, 기자회견에서 이를 공개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요청은 작금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기여해달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남중국해의 ‘남’자도 나오지 않았다”면서 불과 며칠 뒤 실제 상황으로 닥칠 일을 부인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윤 장관은 올 3월에도 “아시아와 태평양은 부상하는 중국과 부활하는 미국을 모두 수용할 만큼 넓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광활한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 두 대국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는 발언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한국 외교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등 미중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마다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다 국익을 놓치는 일이 계속됐다. 이번 남중국해 분쟁은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 규범과 연관된 문제이고, 국제 규범은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의무다. 정부는 외교의 원칙과 전략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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