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난에 연금개혁 칼날… 젊은이들 “내 노후는” 반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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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세대갈등 몸살]<1>세대갈등의 뇌관 된 연금

독일의 은행원 크리스티안 벨레르트 씨(43·헤센 주 에슈보른 시)는 지난달 집을 샀다. 친구들은 “‘콘크리트연금’에 투자한 것이냐”고 했다. 콘크리트연금이란 집을 사두면 은퇴 후 월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연금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에서 나온 용어로, 친구들의 말은 축하한다는 뜻이었다. 콘크리트 연금과 별개로 벨레르트 씨가 노후에 받을 연금은 월 2400유로(약 300만 원)다. 하지만 그와 친구들은 “연금개혁이 이어지면 그만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28일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독일은 한국이 연금개혁의 모델로 삼는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국민 사이에 연금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면서 세대 간 갈등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 유럽에 연금 갈등 움직임

독일 바이에른 주 이헨하우젠 시에 사는 베른하르트 아렌스 씨(67)는 생활비 전액을 연금으로 충당한다. 그는 “전 아내에게 연금 일부를 줘야 하지만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다.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연금 수혜자인 고령층은 연금에 만족하고 있지만 연금보험료를 적립하고 있는 벨레르트 씨 같은 청장년층은 불안해하고 있다.

재정위기 우려가 커진 유럽에서 연금보험료를 내는 근로자들 사이에 연금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상 무너진 상태다. 그리스에서 15년째 공무원으로 일하는 요한나 부트카리 씨(43)는 공무원연금에 월급의 40%를 내고 있다. 2011년부터 월급은 400유로(약 50만 원)가량 줄었다. 부트카리 씨는 “노후 연금으로 월 1000유로(약 125만 원) 정도 받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걸로는 수도료, 전기료 등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20일(현지 시간) 오후 그리스 아테네의 노동사회복지부 청사 인근에서는 호텔 직원 12명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정부가 호텔업 종사자의 연금 지원액을 30% 줄인 것에 항의한 것이었다. 니코스 타카스 씨(30)는 “호텔 근로자가 줄어서 기금 규모가 감소했는데 지원금마저 줄이면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 연금 생활자가 오히려 청년을 부양

이탈리아 밀라노에 사는 에치오 카르네발레 씨(68)는 매달 1800유로(약 225만 원)의 비교적 많은 연금을 받고 있다. 14세부터 일하기 시작해 약 40년간 귀금속 세공 일을 하면서 많은 보험료를 낸 덕분이다. 그는 함께 살고 있는 39세 아들을 사실상 부양하고 있다. 아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독립생활을 꾸리지 못한다. 세무사인 루카 브루네티 씨(57)는 “최근 조카가 집을 사는 데 돈을 보태줬다”며 “젊은이들 사이에 부모 세대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례는 국가가 재정난을 겪는데도 연금을 개혁하지 않으면 연금을 받는 부모 세대가 실업 상태의 자녀를 돌봐야 하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연금개혁이 본격화하면 저소득 연금생활자의 생활고는 더 심해진다. 21일 낮 12시 아테네 국회의사당 정문에 모인 저소득 고령 장애인 200여 명은 장애인연금 개혁에 반대했다. 한 60대 은퇴자는 “4개월 전 정부가 연금지급액을 40유로(약 5만 원) 줄였는데 다시 80유로(약 10만 원) 감액하려 한다”며 “제발 더 줄이지는 말라”고 호소했다. 경기 부진이 여전한 영국에서는 연금 지급액 증가 속도가 20, 30대의 소득 증가율보다 더 빠르다. 쓸 수 있는 나랏돈은 제한돼 있는데 노년층에 대한 복지 혜택이 증가하다 보니 다른 분야에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결국 18∼21세 젊은이들에게 주어졌던 월세 지원금이 중단됐다. 실업수당 지급 요건도 강화됐다. 조시 굿맨 공공정책연구소(IPPR) 연구위원은 “고령층의 투표 참여율이 높은 점을 고려해 정부 정책도 고령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곤 한다”고 말했다.

○ “재정 어려움 공개하고 개혁 착수하라”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사회보장제도를 뜯어고치는 연금개혁 작업은 슬로건의 발상지인 유럽이 한발 앞서고 있다. 특히 스웨덴이 1990년대 초반 이후 추진해 온 연금개혁은 모델로 삼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1년부터 스웨덴 정부와 정치권은 은퇴 직전 15년 동안의 평균 소득을 은퇴자에게 주는 연금시스템을 영원히 끌고 갈 수 없다고 봤다. 당시 복지부 장관을 지낸 보 코른베리 스웨덴 연금청 이사장은 “다음 세대에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기성세대들이 연금을 계속 받도록 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에 따라 개혁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정부와 사민당 보수당 중앙당 민중당 기민당 등 5개 정당이 머리를 맞댄 결과 모든 노인에게 주던 보편적 기초연금이 폐지됐고 저소득층 노인만 연금을 받게 됐다. 스웨덴 집권 여당인 사민당의 토마스 에네로트 원내대표는 “당시 정치권이 ‘모든 노인에게 고액연금을 계속 주겠다’고 했다면 스웨덴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처럼 됐을 것”이라며 “국민에게 재정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개혁에 합의한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유럽 각국은 공적연금만으로 국민의 노후를 보장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사적연금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자영업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사적연금이 일반화돼 있다. 투자 기간이 8년 이상이면 이자소득세 등을 면제해주는 방식으로 사적연금 가입을 유도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국민연금 지급액을 높이는 방안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부는 소득대체율(평균소득 대비 연금지급액 비율)을 크게 높이려면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8.5%까지 높여야 한다고 본다. 정년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높이는 방안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야 정치권은 보험료 인상이라는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김종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연금개혁은 ‘더 내고, 덜 받고, 늦게 받도록 한다’는 게 원칙”이라며 “국민들이 공적, 사적연금에 돈을 많이 쌓도록 정부가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특별취재팀

▽팀장

하임숙 경제부 차장 artemes@donga.com

▽팀원

프랑크푸르트·쾰른·파리=홍수용 경제부 기자

런던·스톡홀롬·삿포로=손영일 경제부 기자

아테네·밀라노=김준일 경제부 기자

김철중 경제부 기자
#유럽#재정난#연금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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