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흔히 “정치는 협상”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권력을 향해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갈등만 반복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협상을 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 협상의 중심은 원내대표다. 대부분의 갈등이 입법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보다 정치적 비중이 큰 사안은 당 대표가 협상에 나서기도 한다.
지도부가 만나서 밀고 당기고, 밀어붙이고 양보하면서 진통 끝에 탄생하는 여야 간 합의는 정치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위의 결과물이다. 정당 간의 공개적인 약속이다. 그런 이유로 언론은 당 대표나 원내대표 간 합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대서특필한다.
그런데 여야 지도부 간의 합의가 너무 쉽게 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계속 오보를 생산하고 있는 것은 기자로서 민망한 일이다.
새누리당 원유철,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1일 회동에서 3일 본회의와 4일 원내대표·수석부대표 간 회동에 합의했다. 하지만 정부가 3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하면서 바로 합의가 깨졌다.
사실 정치권에서 이뤄진 합의가 무산된 사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10월 5일 양당 원내대표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여야정 협의체를 10월 30일부터 가동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9월 28일 공동회견(합의는 아니라고 했지만)을 통해 예비후보 등록 기간을 선거일 전 6개월로 연장한다고 발표했지만 논의조차 없이 유야무야됐다. 앞서 공무원연금 개혁,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정국 최대 현안을 놓고도 여야 지도부 간에 합의가 이뤄지고 깨지기를 반복했다.
정치권에서는 “합의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헌법과 법률을 지키기도 어려운 정치권에 합의를 지키라고 주문한다면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공직선거법에 11월 13일로 정해진 선거구 획정 기한은 지금 상황으로 보면 지켜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2002년 이후 12년을 내리 못 지켰던 예산안 처리시한(12월 2일)을 지난해 겨우 지켜낸 것도 여야의 합의라기보다는 국회선진화법에 의한 ‘타율’ 아니었나.
‘정치는 생물’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툭툭 등장한다. 그래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합의를 번복할 때에는 대개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수시로 합의를 지키지 않다 보니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지도부 간 합의마저 지켜지지 않는 것은 신뢰가 사라진 한국 정치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상황에 따라 깨도 되는 합의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 아닐까. 참을 수 없이 가벼워져 버린 여야 합의의 무게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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