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행사에 얼굴을 내밀면 ‘선거구 획정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촐싹거린다’고 욕이나 먹고 답답한 노릇이죠. 아직까지는 엄연히 남의 선거구니까.”
충청권에서 표밭을 갈고 있는 한 전직 의원은 10일 이같이 토로했다. 내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인접 선거구와의 통합이 확실시되는 답답한 상황 때문이다. 통합이 이뤄질 옆 지역구에는 같은 당 현역 의원이 버티고 있어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선거구 획정안을 둘러싼 여야 협상이 계속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서 여의도 바깥은 문자 그대로 아우성이다. 선거구도 모르는 ‘깜깜이 선거’ 속에 정치 신인이나 원외 인사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수시로 의정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해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시작한 현역 의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된다.
○ “수능 과목 모르는 수험생 처지”
예비후보자 등록(12월 15일)을 한 달여 앞둔 정치 신인은 그야말로 ‘아노미’(무규범, 무질서) 상태다. 지역에 부지런히 얼굴을 알리고 1차 관문인 공천 경쟁 통과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지만 어디서 누구와 대결을 벌여야 하는지 ‘대진표’도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출마를 준비해 온 새누리당 지상욱 당협위원장은 “당장 수능을 치르는데 국영수 외에 과학을 더 볼지, 역사를 더 볼지 안 정해진 상태”라며 “시험 과목도 모르고 시험을 준비하는 꼴”이라고 푸념했다. 인구 하한에 미달하는 중구는 인접한 성동구나 종로구, 용산구와 합쳐져야 하는데 어떤 조합이 이뤄질지는 안갯속이다.
지역에서 만나는 유권자들 반응도 시큰둥하다고 한다. 합구 예정 선거구에서 출마 채비를 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한 원외 인사는 “지역에서 유권자들을 만나도 ‘과연 내가 당신의 유권자가 맞느냐’는 식의 말을 듣는다”라며 “잘 부탁한다고 해도 ‘당신 찍을 수 있게 되면 도와주겠다’는 식의 냉소적 반응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인구 증가로 분구가 불가피한 경기 수원에서 출사표를 낸 새누리당 박종희 제2사무부총장은 “선거구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엔 좀 낫지만 새로 편입되는 경우엔 그 지역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마음이 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올해 넘기면 ‘예비후보’ 자격 상실
원외 인사들도 다음 달 15일 기존 선거구에 예비후보자로 등록해 홍보물이나 문자메시지 발송, 명함 배부 등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 선거구 획정이 안 될 경우 이후에 들이는 시간도, 돈도 공중에 날릴 수가 있다.
분구가 예상되는 대전 유성구에서 표밭을 갈고 있는 새정치연합 최명길 전 공보특보는 “제일 갑갑한 점 중 하나가 홍보물”이라며 “선거구 획정이 안 될 경우 유성구 전체에 뿌려야 하는데 제작, 우편 발송 등 비용이 2배가 든다”고 말했다.
선거구 획정이 올해를 넘기면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 기존 선거구가 없어지며 예비후보자라는 법적 자격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제한적으로 허용된 선거운동이 모두 금지된다.
강원 원주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박정하 전 제주도 정무부지사는 “지역 행사에 가면 기초의원까지 소개해도 원외 인사는 완전히 찬밥”이라며 “그나마 예비후보자로 등록하면 어깨띠를 하고 명함을 돌릴 수 있는데 이마저 금지되면 깜깜하다”라고 말했다.
현역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온다. 지난해 9월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는 예비후보자의 선거운동 기간을 선거일 전 4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는 안을 냈다.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여야 갈등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총선이 코앞에 왔다.
여당의 한 원외 인사는 “현역 의원들은 정치 신인들의 발목을 잡아 놓고 자신들은 구의원이 가도 되는 지역의 작은 행사에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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