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YS맨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2일 01시 49분


거산 김영삼은 역대 한국 대통령 중 가장 강력한 친화력의 소유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지인들의 손목에 시계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계를 벗어 채워주는 식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YS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친화력으로 좌중을 압도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YS는 롤러코스터같은 정치 역정만큼이나 다양하고 광범위한 계보 정치인 그룹을 구축해왔다.

이 중 ‘상도동계’ 또는 ‘민주계’로 불리는 ‘YS 맨’들은 거산과 파란만장한 영욕(榮辱)을 함께 했다. 이들은 혹독한 유신 시대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때로 목숨을 걸고 YS를 지켜냈고, 문민 정부에서는 수십 년 간의 야당 생활을 한 순간에 정리하려는 듯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YS 맨의 1세대로는 ‘좌(左) 형우, 우(右) 동영’으로 통했던 최형우 전 의원과 고(故) 김동영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동국대 동문인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방법을 놓고 종종 충돌했지만 그 대의에는 언제나 뜻을 함께 했다.

김 전 의원은 4선 의원을 거쳐 노태우 정부 시절 3당 합당 결과 탄생한 민자당 원내총무와 노 전 대통령의 정무 1장관을 지냈으나 1991년 8월 김영삼 대통령 탄생을 불과 1년 반 가량 앞두고 암으로 사망했다.

최 전 의원은 김 전 의원의 뒤를 이어 정무 1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내며 순항했으나,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전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졌고 지금까지 정치 일선으로 물러서 있다.

가신은 아니지만 황명수 전 의원, 김수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YS의 대통령 재임 시절 상도동계의 좌장 그룹을 형성하며 영욕을 같이 했다. 박 전 의장은 YS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의장을 거치며 이들 중 비교적 장수했다.

5선 의원을 지낸 서석재 전 총무처장관도 상도동계의 대표적인 시니어 그룹으로 분류되나, YS 퇴임 전후 이인제 의원의 국민신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잇따라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6선의 서청원 의원도 1980년대 중반 YS의 정치적 거점 중 하나였던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인연을 맺은 뒤 YS 재임 시절 정무1장관을 지내는 등 상도동계의 대표적 중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비서 또는 당료 출신으로는 김덕룡 현 대통령국민통합특보와 박종웅 전 의원, 이원종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홍인길 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 김기수 현 비서관,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등이 대표적인 YS맨으로 꼽힌다.

상도동계 중 거의 유일한 호남 인사인 김 특보는 PK(부산 경남) 인사들이 주축인 상도동계의 ‘비주류’였지만, YS 정권 출범 뒤에는 영남 편중 논란을 희석시킬 수 있는 차별성을 기반으로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그는 두 차례나 YS의 정무1장관을 지낼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지난해 대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원로 그룹으로 부상했다.

박 전 의원은 16대까지 내리 3선을 지냈고 최근까지 YS의 대변인을 자처해왔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원외에서 이 대통령을 지원했지만 18대 총선에서 낙천하며 재기에 실패했다.

YS를 비판하면 핏대를 내 ‘혈죽(血竹) 선생’으로도 불린 이 전 수석비서관은 YS 재임 중 1993년 12월부터 1997년 2월까지 무려 4년 반 동안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내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YS 퇴임 후 전국을 돌며 식물 사진을 찍으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있다. 홍 전 수석비서관은 YS 재임시절 청와대의 안살림을 도맡으며 핵심 실세로 군림했으나 YS 임기 막판 한보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구속됐다.

김기수 비서관은 YS 재임시절 내내 대통령 수행실장을 맡았고 퇴임 후에도 줄곧 YS의 곁을 지키고 있다. YS가 청와대 입성 후 경내 지리를 잘 몰라 “기수야 어딨노?”라며 김 실장을 가장 먼저 찾은 일화는 유명하다. YS정권 초기 대통령 민정 사정 비서관을 지낸 김무성 의원은 현재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원내 좌장 역할을 하고 있다.

YS맨이었으나 나중에 YS와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강총’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대표적이다. 40대에 여당 사무총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YS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른바 ‘안풍’(국가안전기획부 선거 자금 사용 논란) 사건에서 YS의 개입 의혹을 폭로하며 멀어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소산(小山)으로 불리며 YS 정권 하에서 ‘소통령’으로 통했던 차남 김현철 씨의 영욕은 누구보다 극적이다.

현철 씨는 1992년 대선에서 여론조사팀을 이끌며 YS의 선거 전략을 지휘했고 부친의 재임 기간에는 별다른 직함없이 여당의 각종 선거 공천에 관여하고 YTN 등 각종 인사에 개입하는 등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했다. 그런 소산은 1997년 한보 게이트에 연루돼 결국 구속됐고 이후 잇따라 총선 출마 의지를 불태우며 정치적 재기를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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