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두 노병의 엇갈린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1일 03시 00분


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열일곱 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물밀듯 내려왔다. 유엔군이 가세했으나 전선은 낙동강까지 힘없이 밀렸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은 것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지역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그해 12월 서울 노량진에서 군에 소집됐다. 약식훈련을 받고 이듬해 2월 네덜란드군에 배속됐다. 7개월 전 한국에 온 1개 대대였다. 참전 16개국 중 네 번째로 파병됐다. 그해 12월 강원 철원에서 소대원들과 척후작전에 나섰다. 적 전초기지 앞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소대장은 기관총 탄약이 떨어지자 탄약수인 그에게 탄약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십자포화에 갇힌 채 150m를 기어가 탄약통 2상자를 가져왔다. 결국 기지를 장악했다. 이 공로로 미군 2사단장으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여러 전투를 치렀고 5년 뒤 제대했다. 올해 82세인 곽경찬 옹이 전화로 들려준 말의 줄거리다.

그는 6·25전쟁 발발 2개월 뒤 대구에서 입대했다. 열아홉 살 학도병이었다. 실제로는 징집이었다고 했다. 전선에 내보낼 병력이 태부족인 시절이었다. 제일 먼저 도우러 달려온 미군, 그 미군의 3사단에 배속됐다. 한국군 지휘권을 넘겨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 결과라고 했다. 일본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은 뒤 전선으로 향했다.

그가 치른 첫 전투가 그해 10월 원산 상륙작전이었다. 이후 함흥과 철원 등의 여러 전투에서 미군 3사단 장병들과 함께 싸웠다. 철원 김화지구 전투에서는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적진을 향해 앞장서 진격하던 소대가 눈앞에서 전멸했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순간이었다. 1954년 3월 미군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6개월 뒤 제대했다. 올해 84세인 박태환 옹이 역시 전화로 전해준 말의 개요다.

여기까지는 두 노병의 사연이 거의 같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아주 드문 80대 노병이라는 점은 똑같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행로가 크게 갈린다. 곽 옹은 제대한 뒤 한국 국방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네덜란드군 대대장이 그의 무공을 한국군에 알린 덕분이었다. 잃어버렸던 동성무공훈장 훈장증도 1985년에 새로 발급받았다. 곽 옹은 참전수당과 무공수당을 합해 매달 30만 원 가까이 받는다.

박 옹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며 1987년부터 거의 해마다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불가 통보를 받았다. 미국 훈장은 안 된다는 답변과 함께….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군인’이라고 칭송됐던 고 김영옥 대령 같은 전쟁 영웅도 6·25전쟁에 참전해 은성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런 굉장한 훈장이 그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형편도 어려운데….

보훈처의 일 처리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합당한 결정이라고 본다. ‘행정 만능주의’라고 비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지금 두 노병의 마음가짐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만은 짚고 싶다.

곽 옹은 종종 훈장 2개를 달고 외출한다. 그는 “참전은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지금도 애국심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겠다”고 말한다. 반면에 박 옹은 개를 줘도 쳐다보지 않을 동성무공훈장이 무슨 소용이냐며 원망이 가득하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박 옹의 울분에 누가 응답해야 할까.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노병#전쟁#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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