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경기부양 더는 안통해… 산업재편 미룰 시간이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8일 03시 00분


[美 제로금리시대 마감]
[美 금리인상, 한국경제 어디로]<2>경제 체질개선 ‘발등의 불’

“돈잔치는 끝났다. 이제 곧 ‘숙취(hangover·행오버)’가 찾아올 것이다.”

16일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벌어질 현상을 놓고 국내외 경제전문가들과 외신들이 내놓는 분석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중병을 앓은 세계 경제는 양적 완화 같은 응급요법으로 일단 큰 고비를 넘긴 듯했다. 하지만 기초체력을 기르기보다 저금리라는 진통제에 의존해온 많은 나라가 금리 인상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숙취 현상’이 구조개혁을 등한시한 한국에도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저유가라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도 산업구조 개편, 노동시장 개혁, 부채 관리 등 지속 성장을 위한 구조 변화를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제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글로벌 경제의 패러다임이 뒤집힌 만큼 더이상 구조개혁을 늦춰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만시지탄’ 구조개혁, 이제라도 속도 높여야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세계 경제에는 지금보다 더 짙은 안개가 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선진국의 경기호황,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신흥국의 약진을 각각 디딤돌 삼아 위기를 빠르게 극복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비빌 언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고(高)환율 정책에 의지한 수출 위주의 성장 모델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의 금리 인상을 계기로 세계 경제의 흐름이 각국의 공조에 기반을 둔 확장 기조에서 구조개혁, 체질개선 쪽으로 급속히 옮겨갈 것”이라며 “우리도 산업화 시대에 맞춰져 있던 경제성장의 틀을 새로 짜고 과감한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정부의 위기 대응책이 ‘발등의 불’을 끄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생산가능인구 감소, 잠재성장률 저하 등 중장기적 문제를 푸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긴축을 통해 가계 빚을 줄이는 동안 한국은 경기부양을 위해 빚을 늘리는 ‘역주행’을 한 것도 정부와 한국은행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세계 경제가 정책 차별화를 통해 각개약진하는 상황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단단히 잡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우리 경제가 엄청난 난기류를 만난 만큼 항해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며 “기업도 사람을 자르는 것 같은 미봉책보다 산업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과감한 투자를 통해 반전(反轉)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준비 착실히 한 일본은 “미 금리 인상이 기회”

이미 예정된 미국의 금리 인상을 앞두고도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 온 정치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경제 활성화나 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각종 법안이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가로막힌 가운데, 위기대응을 위한 ‘골든타임’이 끝나간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미국 금리 인상의 파장이 본격화할 내년 상반기에는 총선까지 예정돼 있어 정부 당국이 여야의 협조를 받으며 시의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크다.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이어지면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며 “고용의 양과 질을 높이고 제조업의 한계를 깨 성장잠재력을 높일 방안을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이전투구하는 동안 일본은 진작부터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비해왔다. 지난해 초 시행된 ‘산업경쟁력강화법’은 1999년 제정된 법의 지원 폭을 확대한 것으로, 일본은 이를 통해 한국보다 2년 앞서 산업 재편에 돌입했다. 충분히 준비해왔다는 자신감을 반영하듯 일본은 17일 미국의 금리 인상이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미국 경제가 착실하게 회복하는 가운데 적절한 판단을 한 것”이라며 “일반론으로 말하면 일본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일본은 미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맺은 만큼 미국 경제의 회복에 따른 수혜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긴장감이 커지자 새누리당은 이를 각종 경제 법안 처리의 기회로 삼으려는 분위기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외 악재들이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비상상황인 만큼 노동개혁 및 경제활성화 등 쟁점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



17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 장병화 한국은행 부총재,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 박세춘 금융감독원 부원장(왼쪽부터) 등 참석자들이 회의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 17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 장병화 한국은행 부총재,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 박세춘 금융감독원 부원장(왼쪽부터) 등 참석자들이 회의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정부 “자본유출 가능성 대비” ▼

외환 건전성 제도 원점 재검토

“경상수지-재정 등 펀더멘털 양호… 美금리인상 영향 크지 않을듯”


미국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은 고민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많은 전문가는 한은이 금리를 따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시장 동향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17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금리 인상이) 금융시장의 부정적 영향을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고 말하면서도 내년 초 금리 정책에 대한 힌트는 주지 않았다.

미국이 내년에도 금리를 계속 올리면 한은은 자본 유출 우려 때문에 기준금리 인상 압박을 강하게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국내 경기에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한은은 최근 물가안정목표를 2.0%로 정하면서 ‘저물가 탈피’를 정책목표로 잡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금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승훈 삼성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정부와 한은이 저물가 기조 탈피를 정책목표로 내세운 만큼 한은이 내년에 금리 인상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날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않은 채 잇달아 회의를 열며 시장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에 나섰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급격한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기존의 외환건전성 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주형환 기획재정부 차관은 이날 오전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한국은 원유나 원자재 수출국이 아니고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액 등 대외건전성은 물론이고 재정건전성 등에서도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양호하다”며 “여타 신흥국과 차별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선물환포지션 규제, 외환건전성 부담금,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등 현행 ‘거시건전성 3종 세트’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거시건전성 3종 세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단기성 외화자본의 급격한 유입을 막기 위해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됐다.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 자본 유출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라 규제의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는 관계기관과 ‘외환건전성 제도개편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해 관련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한 뒤 내년 상반기에 개선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세종=홍수용 기자 / 도쿄=장원재 특파원
김재영 redfoot@donga.com
#미국#금리#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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