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건물 北노동자들이 다 지어”… 4만여명 파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2일 03시 00분


[유라시아 극동개발 현장을 가다]<2>北, 러 인력시장서 외화벌이 박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평양행 고려항공 여객기를 타려는 북한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탑승 수속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사할린,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등 극동지역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이 공항에서 여객기를 바꿔 타고 평양으로 들어간다. 
블라디보스토크=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평양행 고려항공 여객기를 타려는 북한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탑승 수속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사할린,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등 극동지역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이 공항에서 여객기를 바꿔 타고 평양으로 들어간다. 블라디보스토크=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올해 10월 16일 오전 5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새벽부터 평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북한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로 검은색 점퍼를 입은 근로자들은 공항 안 음식점과 매점에서 식사를 하거나 간단한 음료를 샀다. 이 공항은 사할린,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등 극동지역을 평양과 잇는 북한 노동자 송출의 허브다. 북한 노동자들은 과거 철도를 통해 북-러 국경 도시 러시아 하산을 거쳐 들어왔지만, 최근엔 주로 항공편으로 일터인 극동지역을 오가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러시아로 들어가는 북한 노동자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 노동부가 내놓은 외국인 고용허가증 발급 현황에 따르면 올해 1∼3월 러시아에서 고용허가를 받은 북한 노동자는 4만7364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 증가한 규모다.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가 떨어져 전체 외국인 노동자들이 12% 줄었지만 북한 출신 노동자는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러시아에 인력을 대규모로 처음 파견한 것은 10여 년 전. 당시 러시아에 있으면서 이들을 만났던 기자의 눈에 이번에 만난 노동자들 모습은 그때와는 판이했다. 카키색 인민복 대신 현지에서 구입한 겨울 점퍼를 입고, 러시아에서 벌어들인 루블화로 가전제품도 사들이고 있었다. 이들은 “해외 노동이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고도 했다. 또 “지금도 보위대의 감시를 받기는 하지만 과거처럼 매달 돈을 뜯기지는 않는다”고 고백했다.

○ 공사장 인근에 방 따로 “자유를 느껴”

사할린 건설현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하는 김영철(가명·53) 씨는 오후 12시 35분 평양으로 떠나는 고려항공 JS-272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2년부터 사할린에서 일했다는 김 씨는 평양 소재 대학에서 건설경영학을 전공했다.

김 씨는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작업반장은 남한으로 치면 팀장급”이라고 했다. 남한 사정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남한 TV에서 봤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 씨에 따르면 사할린에는 북한의 인력송출 기업이 5, 6개 있다고 한다. 한 곳에서 50∼150명의 노동자가 집단으로 모여 살며 함께 숙식을 해결한다.

일부 노동자들은 공사장과 가까운 곳에 방을 따로 얻어 2∼4명씩 생활한다. 공사장 인근에서 따로 생활하면 해외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사할린에선 러시아 브로커를 통해 일감을 얻는다. 사할린에만 2000명 정도의 북한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 노동자들이 일을 꼼꼼하게 잘한다는 말이 퍼져서 일감은 쉽게 얻는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미장공, 콘크리트공 등 주로 건설업에 투입된다. 건축자재를 팔고 있는 한국인 하모 씨는 “북한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지 연해주의 도로와 건물은 북한 노동자들이 다 지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이하성(가명·56) 씨도 “미장공으로 일하는데, 일감만 있으면 한 달에 4만 루블(약 66만 원)을 번다”고 말했다. ‘번 돈을 다달이 뜯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옛날처럼 매달 뜯기지는 않고, 노동기간 3년이 지나고 기간을 연장할 때 2만 루블을 내면 된다”고 대답했다.

○ 삼성 스마트폰 사용하는 북한 여성

10월 16일 북한 노동자들이 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는 동안 평양에서 출발한 고려항공 JS-271기는 오전 11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사할린 등 다른 지역으로 가려는 북한 노동자들이 쏟아졌다. 북한 기업이나 당 요원으로 보이는 40대 남성이 40, 50명의 북한 노동자를 통솔했다. 어떤 서류를 나눠주기도 했고 일부 노동자를 데리고 어딘가로 이동하기도 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로 향하는 비행기는 다음 날 오전 5시 40분 출발한다.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부 북한 노동자들은 장시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이동하기도 했다.

일주일 뒤인 10월 23일 낮 12시경에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는 아들과 부인, 아버지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간부들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두툼한 지갑에서 1000루블짜리 고액권을 빼내 공항 선물가게에서 물건을 수시로 샀다. 이들의 짐 가방에는 식용유와 선풍기, 방한복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족을 따라 다니던 한 아이가 “와, ‘울라디’(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식 발언)가 너무 좋다”고 말하자, 간부로 보이는 아버지가 “그래, 최고지”라고 대꾸하는 소리도 들렸다.

공항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공항 내 레스토랑, 자판기, 커피숍 등을 이용했다. 대화도 자유롭게 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2G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북한 공관 인사로 보이는 한 여성도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한글 자판을 치며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기도 했다. 전화를 받는 상대방에게 러시아 남자 이름을 대더니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SNS를 통해 전송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한국 업체의 SNS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 당 간부로 추정되는 한 40대 부부 가족도 보였다. 큰아들은 초중생, 둘째는 유치원생 정도로 보였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 옷에는 김일성 배지가 붙어 있었다. 큰아들은 왼손에 코카콜라를 들고 나이키 신발을 신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러시아#북한#극동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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