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A(33·여)씨는 지난해 사귀던 연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A씨의 전 연인은 이혼 경력이 있는 B(35)씨.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A씨의 부모는 B씨가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평소 B씨는 연인을 잘 챙기고 따뜻하게 대했지만 결혼 반대에 부딪치자 괴물 같은 성격으로 변했다. 한밤중 A씨 집에 불쑥 찾아와 잠자는 A씨를 강간하거나 집 안 물건들을 A씨에게 던지고 가기도 했다. 때론 A씨에게 “사랑 대신 부모의 뜻을 택한 너는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없다”고 비난하고 A씨를 욕하는 글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참다 못한 A씨가 이별 선언을 하자 B씨는 “SNS에 올린 글의 대상자는 네가 아닌 내 주위 사람”이라고 둘러대거나 태도를 바꿔 “날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A씨가 B씨와 연락을 끊기 위해 휴대전화번호를 바꾸자, B씨는 A씨의 회사 앞에 찾아와 A씨를 마구 때려 전치 3주 상해를 입혔다. A씨는 폭행을 당하고 나서도 이것이 ‘데이트 폭력’임을 한참 후에야 인지할 수 있었다. 데이트 폭력 피해가 심각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연인 간 폭력 및 살인미수 사건은 2010년 7720건, 2011년 7143건, 2012년 7536건, 2013년 7189건, 2014년 6774건 발생했다. 강간이나 강제 추행은 2010년 371건에서 2014년 678건으로 2배가량 늘었다. 전문가들은 신고되지 않은 실제 피해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정서·경제·성·신체적 폭력으로, 상대 행동을 감시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휘두르는 직간접적인 폭력이 모두 해당한다. 기타 폭력과 다른 특징은 ‘호감을 갖고 만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폭력을 당한다는 점이다. 신지영 한국여성상담센터장은 “데이트 폭력은 교제 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하거나 관계를 끊기 어렵고, 피해를 당했을 때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연인 사이에서 왜 폭력이 발생하는 걸까. 연인 간 폭력은 ‘사랑의 변형된 형태일 수 있다’고 믿는 그릇된 가치관 때문이다. 신지영 센터장은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인데, 여성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여성을 구속하는 행위가 남성답고 강해 보인다는 편견 때문에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러한 정당화가 지속되면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자존감이 낮은 경우 폭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사태를 악화한다는 지적도 있다. 손석한 연세정신과의원 원장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신체적 폭행을 당했을 때 자존감이 낮으면 ‘내가 잘못해서 상대방이 폭행한 것이다. 상대방에게 잘 하면 관계가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해 폭력의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 또한 어렸을 때 폭력 피해자였을 경우 성인이 된 후 연인 관계에서도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관계를 지속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사랑싸움’으로 치부해선 안 돼데이트 폭력이 연인 간 ‘사랑싸움’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애정 문제’ 정도로 사소하게 취급되는 경향도 폭력 관계를 지속시킨다. 이미라 아주대 성폭력상담센터 전임연구원은 “데이트 폭력이 반복될 때 피해자는 관계를 끊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의 대응에 따라 폭력의 내용과 형태를 변형하면서 관계를 단절하려는 피해자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또한 데이트 폭력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정보나 취약한 부분을 잘 알기 때문에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피해자는 점점 고립되면서 폭력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데이트 폭력이 발생한 후에도 연인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하는 경향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의 40%가 가해자와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특히 피해자가 신체적 폭력을 당한 후 관계를 끊지 않는 이유(복수응답)는 △헤어질 만큼 심하지 않아서(60%) △나도 잘못한 부분이 있어서(26.4%) △참고 견디면 변할 것이라 생각해서(17.3%)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15.5%) △좋을 때는 잘해주니까(11.8%) 순으로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비정상적인 소수의 남자’로 치부되기 쉽고, 이는 폭력을 ‘피해자 여성이 연인을 잘못 선택한 탓’으로 돌리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미라 전임연구원은 “데이트 폭력은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개인적인 성향으로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또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더라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약한 남성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폭력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행위는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뿐”이라고 강조했다.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폭력에 대해 적절한 개입이 이뤄지도록 주변에 상담과 협조를 요청하고, 폭력에 대한 사건일지를 기록하거나 문자메시지 캡처, 대화 녹음 등 증거를 남겨야 한다. 이미라 전임연구원은 “피해자는 폭력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폭력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또한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공신력 있는 상담기관에 상담을 요청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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