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는 포기하라는 게 아닌데 ‘총선포기’ 운운하며 공격받아
선거철만 되면 黨 개혁 목소리… 인적쇄신보다 근본적 체질개선을
文-安에게 필요한 건 신의 한수… 1보 후퇴 포석으로 대마 살려야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다. 기초가 흔들리면 겉모양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버티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장폴 사르트르의 ‘전진과 후퇴의 방법론’이다. 그는 정통 좌파 진보 진영에 전진의 나팔을 불기 전에 후퇴의 지혜, 즉 자기 성찰을 요구했다. 자신 안에 견고하게 구축된 관성의 법칙, 낡은 고정관념과 기득권을 버리고 2보 전진을 위한 자기 혁신의 재무장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나는 오늘의 제1야당에 꼭 필요한 것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래서 12월 5일자 ‘동아광장’ 칼럼에서 문재인 대표에게 내년 총선을 위해서라도 오만과 독선을 버릴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미 마이웨이를 선언한 상태였고 나는 불안했다. 예감도 나빴다. 그래서 문 대표가 계속 기득권을 사수한다면 “유권자의 탈바꿈이 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어차피 내년 총선은 틀린 것이고 다음 대선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제1야당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가치판단의 돌연변이가 넓게 퍼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신당을 둘러싼 정치지형이 크게 변할 것이다. 야권 개편의 회오리바람이 불 것이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불길한 예측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 버렸다.
차제에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내가 언급했던 돌연변이는 문자 그대로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이다. 결핍, 절망, 분노, 열망 같은 것들이 응축되어 터지는 현상이다.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일단 발생하면 급속히 퍼진다. 나비가 훨훨 날아가듯이. 나는 이런 대중의식의 집합적 돌연변이를 나름대로 읽었고 표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관찰명제를 당위명제로 왜곡하여 내가 총선을 포기했다거나 제1야당 붕괴를 주장했다는 난폭한 해석이 나왔다. 진중권 교수는 이런 범주적 해석 오류에 입각하여 심지어 ‘IS’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내가 마치 극단주의자요 종말론자인 양 매도하고 냉소와 야유의 인신공격을 했다. 조국 교수는 나의 입장을 총선 포기로 단정하고 이것이 안철수 신당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는 해괴한 책임 전가 논리를 폈다.
이에 나의 입장을 밝히자면, 나는 30년 동안 중민이론을 주창해 왔다. 1980년대 변혁기의 산물인 중민이론은 중산층과 서민의 공존을 지향한다. 개혁을 추구하되 이념의 급진화를 경계한다. 실사구시의 방법론을 옹호한다. 국민을 양쪽으로 분리시키는 것 대신 중심으로 모으는 중심화 전략을 추구한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한국 정치는 양극화의 길을 걸었다. 선거 때가 되면 양당은 인적 청산을 내걸었지만, 정당의 낡은 체질에 ‘새 피’가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따라서 나는 인위적인 인적 청산 대신 정당의 근본적인 체질 개혁을 선호한다. 민주당 전통의 제1야당에 자신의 뿌리인 중도 개혁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실사구시 정책으로 민생 문제 해결에 앞장설 것을 여러 번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1보 후퇴의 방법론은 제1야당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나는 민주당 18대 대선평가위원장 일을 시작하면서 곧장 충남 대천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밟자고 제안했다. 총선과 대선을 이끈 지도부를 향해 부디 과오의 진솔한 소명으로 유권자의 멘붕을 치유하고 당내 화합을 이루어 미래로 전진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사코 책임을 외면하는 당의 패권정치가 당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아쉽기 한이 없다.
안철수 의원이라고 1보 후퇴의 방법론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는 많은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18대 대선 당시 야권 후보 사퇴, 그 뒤의 행적들이 석연치 않다. 그 뒤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택한 민주당과의 통합, 공동대표 취임, 실패, 퇴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넘어 포기했다. 이 과오에 대한 진솔한 소명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떠났던 지지자들이 가슴을 열고 돌아올 수 있다. 척박한 한국 정치에 감동을 줄 수 있다.
요약하자면, 2보 전진의 핵심은 정책과 비전이지만 1보 후퇴는 유권자와의 정서적 결합이다. 정서적 유대가 파괴되면 사상누각이 되고 그러면 백약이 무효다. 총선 포기 시비는 독약일 뿐이다. 자신의 과오를 남에게 떠넘기려는 술책에 가깝다. 이런 짓 모두 접고 멋있는 혁신 경쟁에 전념하라. 결국 유권자가 판정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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