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는 불안한 기운을 내뿜는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무도’는 도리가 무너진 야만의 상태를 가리킨다. 대통령은 연일 “역사의 심판”을 외치는데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대통령 탓”이라며 귀를 막는다. 독설이 비수처럼 날아다니며 꽂힐 과녁만 찾는다. 서로가 남 탓하기에 바쁘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오늘의 한국처럼 어지럽기만 하던 중국 명말청초 시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담은 문장 가운데 가려 엮은 ‘흐린 세상 맑은 말’을 펴내면서 이렇게 썼다. “마음 밭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쑥대만 뒹군다. 미쳐 날뛰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나는 누군가?’ ‘어디로 가는가?’를 되물어야 할 때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반성’이다. 정 교수는 청나라 오장이 지은 수필집 ‘오환방언’에서 다음 문장을 뽑았다. “내가 평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 되자 지난 사십구 년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내 호를 ‘지비도인(知非道人)’이라고 하였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누구나 지난 일을 돌아본다. 그 속에는 바보처럼 살아온 부끄러운 내 모습이 있다. 내 눈에 들보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음엔 마음속 가시를 빼내야 한다. 명나라 육소형이 쓴 ‘취고당검소’에 딱 맞는 문장이 있다. “가슴속에 든 가시를 갈라 없애 남과 내가 편히 왕래케 한다면 이야말로 천하에 으뜸가는 유쾌한 세계다.” 마음속 가시까지 발라냈으니 이젠 벗들과 함께할 시간이다. “남을 증오하는 모습은 술잔에 떨어뜨리고, 세상을 슬퍼하는 마음은 시구 속에 감추어둔다”(명나라 하위연의 ‘구사’), 정민 교수는 이렇게 풀이한다. “한잔 술에 마음속에 도사려 있던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눈 녹듯 녹아버린다. 시 한 수로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죄 털어버린다. 군자가 세상을 살아감은 이와 같을 뿐이다.” 아직도 미움과 분노와 자책으로 가득한 마음 대청소가 끝나지 않았다면 나토리 호겐의 ‘신경 쓰지 않는 연습’을 권한다. 첫 장 ‘불교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란 문장부터 마음에 든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가치관에서 벗어나 무슨 일이 있어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경지를 목표로 삼으라는 것. 그리고 ‘인생의 멋진 일’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O세가 된다. 올해 보는 경치는 O세가 되어 처음 보는 경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어제 경험한 일이나 얻은 정보는 그제의 내게는 없었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변화한다. 매일 새로운 나로 갱신되는 것이다.” 때로는 뻔한 경구가 우리 마음을 울린다. 오늘밤 증오는 술잔에 떨어뜨려야겠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강명관 지음/ 휴머니스트/ 348쪽/ 1만8000원 조선시대에 ‘서양’은 두 갈래로 들어왔다. 한 갈래가 ‘종교-천주교, 과학-천문학·수학, 지리학-세계지도’ 같은 사상과 텍스트라면 다른 한 갈래는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 같은 물건 형태였다. 한문학자인 저자는 조선시대 지식인의 책상에 올라온 5가지 물건을 통해 조선사회가 인식한 서양을 재구성하고, 격리된 공간으로서 조선 후기 지식사회의 한계를 보여준다. 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문학과지성사/ 631쪽/ 1만6000원 상복 많은 작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마을 사람들이 ‘바느질하는 여자’라고 부르는 어머니 수덕, 물과 기름처럼 다른 금택-화순 자매 세 모녀가 사는 우물집을 중심으로 옷을 지어 입으러 들락거리는 손님들의 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어머니가 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금택의 시선에서 2200매짜리 장편소설이 완성됐다. 거룩한 술꾼의 전설 요제프 로트 지음/ 파블로 아울라델 그림/ 김재혁 옮김/ 책세상/ 100쪽/ 1만1800원 18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태어나 유대인이자 종군기자, 망명자로 20세기 초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요제프 로트는 나치정권에 의해 철저히 지워졌다. 사후 작품 재출간과 함께 재조명받는 로트는 생전 열렬한 애주가로 망명지 파리에서 바와 카페를 전전하던 삶을 단편소설 ‘거룩한 술꾼의 전설’에 담았다. 알코올을 ‘생명의 불꽃’ 삼아 살아가는 안드레아스의 기이한 이야기.
7인의 충고 이철희 지음/ 답/ 376쪽/ 1만5000원 의지도 없고 실력도 없고 단합도 없는 ‘무능한 야당, 못난 진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가 전문가 7명을 인터뷰했다. “민주주의는 시끌벅적한 것”(최장집), “유능하지 않은데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윤여준), “호남과 친노에게 묶이는 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지향했던 정치와도 배치된다”(이상돈), “치열하게 싸우다 갈라서는 게 옳다면 갈라서라”(강원택) 외에 강준만, 서복경, 박상훈이 답을 내놓았다. 진보 열전 남재희 지음/ 메디치미디어/ 312쪽/ 1만6000원 신문기자 20년, 국회의원 16년에 김영삼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저자가 진보에서 리버럴까지 다양한 정치색깔을 지닌 사람들과의 50년 교유록을 펴냈다. 민족통일을 꿈꿨고, 혁신정치(지금의 진보)를 지향했으며, 대부분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는 송남헌, 박진목, 김낙중, 이동화, 고정훈, 김철 등 12명에 대한 인물스케치와 함께 언론인 조세형, 박권상에 대한 추모글도 추가했다.
행복한 책읽기 김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376쪽/ 1만5000원 1975년 12월 12일 문을 열어 창사 40주년을 맞은 문학과지성사가 창간 동인 김현의 25주기를 맞아 92년 초판을 낸 ‘행복한 책읽기’ 개정특별판을 펴냈다. 85년 12월 30일부터 89년 12월 12일까지 381일 치 일기를 엮은 이 책은 김현 비평의 핵심과 사유의 궤적을 보여준다. 92년 이인성이 쓴 해제에는 “선생의 유고 일기를 원문대로 아무 삭제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출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볼 수 없었기에 떠났다 정윤수 지음/ 천의무봉/ 448쪽/ 1만7000원 문학, 음악, 일상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 및 비평 활동을 해온 저자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여행의 기록. 지리산을 넘어 임실로, 다시 전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국도변 풍경을 바라보며 떠오른 단상들, 전남 장흥과 보성에서 이청준, 한승원과 남도 육자배기를 떠올리는 식으로 1부 ‘홀로 떠나다’, 2부 ‘문학 속 풍경을 찾아들다’로 나눠 진행한다.
여배우들 한창호 지음/ 어바웃어북/ 336쪽/ 1만8000원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로 스타가 된 메릴린 먼로는 ‘금발 백치’ 역을 싫어했지만 평생 비슷한 역을 반복해야 했다. 잉그리드 버그먼, 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이자벨 아자니, 한국의 최은희와 문정숙까지 여배우 50인의 삶과 정체성을 조명한 책. 악녀의 탄생(1940년대), 관능의 시대(1950년대), 시대와의 불화(1960년대), ‘배우’라는 이름으로(1970년대) 등 시대 구분도 흥미롭다.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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