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은 금융권 대출 500억 원 이상인 대기업 386개사를 대상으로 신용위험평가를 실시한 결과 19곳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어제 밝혔다. 이 가운데 C등급 11곳은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돌입하고, D등급 8곳은 정리 절차에 들어간다.
정부는 상반기 구조조정 대상 35곳을 합한 올해 전체 구조조정 실적이 54곳으로 2010년(65곳) 이후 최대라고 홍보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국회 공전으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내일부터 일몰(日沒)됨에 따라 채권은행협의회의 소집이 통보되지 않은 일부 기업의 워크아웃은 자율협약에 맡겨야 한다. 신속하게 단행해야 할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신용위험평가 결과 금감원은 ‘자체 경영개선 프로그램 적용 대상’에 23개 업체를 끼워 넣었다. 이 기업들은 정상기업인 B등급과 워크아웃 대상인 C등급의 중간쯤이라는 의미다. 구조조정은 엄정한 기준에 따라 등급을 나눠 절차대로 하면 되지, 어정쩡한 회색 지대를 두어 논란을 키울 일이 아니다. 이번 평가 과정에서 ‘괴로울 정도로 많은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정치권의 입김에 따라 23개 기업에 면죄부를 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채권은행이 내년 상반기 23개 기업을 자체 모니터링해서 추가 구조조정 여부를 결정한다지만 부실채권이 늘어날 부담을 감수하며 은행이 적극성을 보일 것 같지 않다. 특히 내년 4월 총선 전 표에 도움이 안 되는 구조조정은 실행에 옮겨지기 힘들다.
금감원은 ‘영업점 성과평가기준(KPI)’이라는 생소한 제도를 만들어 은행 직원이 구조조정을 잘하면 인사 때 승진에 유리하도록 인센티브를 줄 예정이다. 민간은행 인사에 금융당국이 이런 식으로 개입해도 되는 것인가.
기업 구조조정은 내년 한국 경제의 명운을 가를 열쇠나 다름없다. 1997년에는 한보 삼미 진로 기아자동차 등 은행돈으로 무리하게 덩치를 키운 기업을 방치하다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정치권의 외압에 휘둘리고, 시늉만 하다 마는 구조조정으로는 경제 위기의 악몽이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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