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 고위 임원을 최근 만났다. 23세 신입 사원의 명예퇴직 신청 소식이 알려진 날이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를 내건 기업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앞서 이 회사는 올 들어 3차례나 명예퇴직을 통한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1월에 인원 정리를 할 때만 해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 한 달도 안 돼 4번째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중국 시장에서 매출액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게 가장 컸다.
해당 임원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접어들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려운 시절이라고 단언했다. 그 이유로 시장의 부재(不在)를 들었다. 과거 위기 때는 제품을 사 줄 해외 시장이 있었기에 재기의 희망이 있었다고 했다. 반면 지금은 내다 팔 시장이 점점 줄고 있어 그때보다 더 암담하다고 한숨지었다. 그동안 한국 경제를 먹여 살렸던 신흥 경제 대국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예전의 그 시장이 아니다. 브라질의 국가신용등급은 투기등급으로 떨어졌다.
이처럼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다 보면 과거 경제위기를 자주 빗댄다. 그러다 보니 등장하는 가설이 ‘경제위기 10년 주기론’이다. 1997년과 2007년에 이어 2017년에도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공포다. 주요 그룹의 한 사장은 “관성으로 어떻게든 내년은 버틸 것이다. 정말 어려운 시기는 2017년에 찾아올 것으로 내부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충격파가 이전 위기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장 부재론’ ‘좀비 기업론’ ‘정치의 경제 발목잡기론’ 등 이유는 갖가지다.
여기에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 경제 대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3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던 프랭크 루스벨트는 “두려움 그 자체 이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했다. ‘예고된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와 일맥상통한다. 기업들이 선제적인 사업 재편, 인수합병(M&A), 인력 조정 등에 나서려는 것도 보이는 위기를 ‘진짜 위기’로 맞지 않기 위해서다.
아쉽게도 희망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대기업 10곳 가운데 한 곳이 만성적 한계기업이다.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정부가 제출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 개정안은 끝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약 35개 대기업이 법안 통과 실패로 회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업개선절차(워크아웃) 대신 법정관리로 직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부업체 최고 금리를 제한하고 있는 대부업법 개정안 통과가 무산돼 서민들이 내년부터 고금리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말문까지 막힌다.
박근혜 대통령은 연일 국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열심히 하는데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정 운영과 정치는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치는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한 전문가의 지적이 와 닿는다. 부친인 고 박정희 대통령도 야당 당수와 단독 면담을 통해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번도 야당 당수를 따로 만나지 않았다.
어김없이 2015년도 마지막 날을 맞았다. 절망이 희망을 덮는 우울한 세밑이다. 또 다른 내일에 불과하지만 새해 첫날은 희망이 절망보다는 많은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려하는 ‘경제위기 10년 주기론’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기업이든 정부든 국회든 가계든 그 역사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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