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2016]A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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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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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당선작]<줄거리> 김봉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2014년 봄, 나는 연인과 헤어졌다. 같은 날, 나는 교수가 강요하는 미니멀리즘 글쓰기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5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공덕역을 지나며 그에게 문자를 했다. 더 이상 그 교수를 견딜 수 없어. 강요당하고 무시당하는 굴욕을, 그 모든 억압을 참을 수 없다고 나의 연인에게 말했다. 여름부터 구직활동을 시작할 거야, 이렇게 사는 것도 구질구질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그는 며칠 전 내가 쓰레기라고 욕한 형사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턱수염을 만졌고, 나와 같은 색으로 염색해 준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말이지 못생겼다고 타박했다. 그가 입은 스트라이프 반바지 위로 불룩 솟아오른 배를 만졌고, 손을 집어넣어 팬티 위로 그의 성기를 잠시 매만졌다. 그랬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그는 나에게 잠시 일어나 앉아보라고 말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던가? 생각하며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그와 마주 앉았다.

나,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구.

그와 내가 나눈 대화는 도무지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묘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어떤 수사학적 기교를 부리더라도 그 장면을 진부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없다. 거듭 그 장면을 떠올릴수록 그것은 나에게 외설로만 다가왔고, 떠올리고 싶지 않아졌고, 이제는 몇 개의 단어, 그러니까 친구, 가족, 이기적 같은 단어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는 그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서재에 들어왔다. 사방이 막힌 방은 뜨뜻미지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급격하게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종내에는 나에게 눈물까지 내비쳤지만, 이내 ‘해피 투게더’를 보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미쳤나?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 그 정도의 즉흥적인 판단이길 바랐다.

3주 전 교수는 세월호에 관한 글을 써 오라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 속 인물을 1인칭 시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써 오라고 말했다. 친절하게 에어포켓이라는 제목까지 붙여 주었다. 나는 당연히 쓰지 않았고, 수업에 불참했다. 교수는 조교를 시켜 불참한 학생을 소환했다. 그의 권위가 아직 나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탓인지, 더는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소환에 응했다.

그는 새로운 과제를 내주었다. 이번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의 1인칭 시점으로, 이제는 에어포켓이 없는 상황이라고 지정해 주었다. 맛이 갔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만적인 과제를 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수업시간, 나는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시점만 바꾸어 제출했다.

그는 나의 거짓 과제를 보고서도 나의 글쓰기에 대해 비난했다. 넌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해. 그건 너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길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신물 나는 애정,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은 그의 눈엔 그저 멋부림에 불과했다. 교수 자신은 거리낌 없었던 전위나 실험을 내가 하는 것은 객기였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무릅쓴 것에 대해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한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곱씹으며,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글로 옮겨 보려 하지만,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낯선 시간 속으로 불꽃이 폭발하듯 날아가 버리고, 불티처럼 사라져버린다. 그와의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그것은 파편으로만 떠돌 뿐 나는 그 어떤 것도 이어붙일 수 없었다. 그를, 그와의 사랑을, 적어도 나의 감정만이라도 박제하려 시도하지만,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변해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운동을 하고, 제 모습을 바꾸고, 가끔씩 그때와 꼭 같은 모습을 보이고는 얼른 달아나 버렸다.

이 글을 한편의 이어진 글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모든 것은 조각조각 나 버리고, 이음매는 그대로 드러나 버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형식은 꼭 산문이어야만 했다. 내가 산문을 쓰겠다는 마음가짐은, 이 글을 산문으로 쓰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몹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그와의 관계와 시간과 공간은 이제 이어붙일 수 없을 만큼 멀리 흩어져 버렸다. 그와 헤어진 이후 내게 들어맞는 문법은 점프 컷이었다. 그와의 시간도, 내 일상도, 기억도 오히려 점프 컷이 자연스러웠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고, 시작되고, 어느 순간 이어져 있음을 기뻐하다 다시 끊어졌다, 이으려 하고, 우리는 이어질까?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나는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이야기가 된다는 내밀한 확신에서 오는 희열을 나는 버리지 못하고, 그 어리석음, 단절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나는, 모든 것을 잇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글을 쓴다.

나는 하나도 미니멀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나는 경제적 인물이 아니며, 아무런 재화를 창출하지 못한다.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지 못하고, 내 감정도 절제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며 내가 행동한 일이라고는 그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떠올리고 그것을 잇는 것이 거의 다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진짜였다.

우리의 이야기, 그와 나 사이의 유행어와 의성어와 의태어는 이제 사어가 될 것이다. 그에게 나의 옷을 입혀 놓고 기뻐하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그와 입을 맞추고, 그의 수염에 찔리고, 내 수염을 긁으면서 깨닫는. 아,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이지, 하고 느끼는 은밀한 쾌감. 그것을 다시 느끼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와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했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와의 사랑이 끝난 지금, 끝나가는 지금, 나는 반쯤 용기를 잃었다.

2015년 봄, 현재는 사라지고 과거만이 남았다. 있었다. 돌출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였다.

여름, 비 오는 날의 아침을 꿈꾼다. 그것은 완전히 유년의 기억은 아닌, 적어도 10대 초반 무렵 보았을―정말로? 꿈으로?―것으로… 나는 비 오는 여름날의 아침을 꿈꾸고 만다. 그러나 이 여름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것이 거짓이라는 생각에, 나의 기억이 아닐 것이라는 초조함에, ‘여름’이라는 단어만으로 그려진 환상이리란 은밀한 암시에 이제는 그만두어야지 되뇌면서도 그것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여름 이전, 모든 것이 지루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구체적인 인물도 사물도 없이 오직 감정만이 나에게 남아 있다. 권태라는 감정은 필연적으로 남자들을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후각적이다. 석유난로가 타오르며 실내를 가득 채우는 냄새,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 볕을 받아 뜨거워지는 모과의 향기, 공중목욕탕 하수구 냄새, 아버지의 뺨에서 나는 스킨브레이서의 향기.

기억이라는 것을 해낼 수 있는 역행의 마지노선을 전후로 엄마에 대한 기억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놀란다. 옛집에서, 그리고 그 후로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리도 무람없이 어른의 공간에 나를 데리고 다녔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도 지루하고, 매캐한 냄새가 나고, 초록색 부직포 위에 유리를 깔아 놓은 공간, 사무실, 보신탕집, 철판 요릿집, 산 낙지를 먹었던 밀실 같은 곳들.

아버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려 했고, 두려움에 떠는 개들이 때로는 하품을 하듯, 나는 권태로웠다. 숨 막히는 남자들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진공, 거의 무한하게 확장되는 권태의 시간. 나는 권태로 더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이 한 번일 뿐인데, 그것이 무섭고 아쉬워 나는 지루함을 발명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한번 지금을 권태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올봄, 수업에서 읽기 시작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키냐르의 ‘옛날에 대해서’에서, 뷔토르의 ‘변경’에서, 아니 눈앞의 모든 것들이 과거로, 옛날로, 옛날 사람들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로, 내가 몰두해야 할 것은 시제, 새로운 시제를 생각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시제를 만들어 내거나, 아오리스트(그리스어 동사 시제로서 명확한 시점을 밝히지 않는 과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그것―밝힐 수 없는―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렀다.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 잠을 줄이고 싶었고 깨어 있는 동안 절대 졸지 않았다. 거의 시간은 사라졌다. 시간은 없었고, 온도와 계절감만으로 어렴풋이 확인 가능한 흐름 속에서 나의 일상은 그야말로 충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의 공포에 휩싸여, 써야 할 지금이 써야 할 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글과 좋은 사람과 좋은 수업으로 보냈던 시간들, 무탈하기 그지없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충만함으로 텅 비어 버렸고, 조금이라도 흘려 놓은 나의 흔적을 찾으려 온갖 곳을 뒤져 보았지만 쓰일 만한, 쓰일 수 있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지난해 5월, 사랑하던 남자와 끝이 나고, 나는 모든 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오직 잠만을 기다렸다. 그 남자가 돌아오기를,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만큼 나는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꿈은 없기에,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오직 잠이 필요했다.

나는 벌판에 서 있었다. 꿈의 색조는 노란색이었다. 트랙처럼 긴 공간, 헤아릴 수 없으나 끝은 보이는 야외에서, 그곳은 거의 뚫려 있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건너편에는 돌로 된 산이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터미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임을 확신했지만, 터미널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상해볼 수도 없는, 나의 인식으로 조합해낼 수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터무니없이 낯선 곳이지만 명백하게 터미널인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터미널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 이미지를 곱씹었다. 그것은 도시의 근대 사진전에서 보아 꿈에서 직조된 것이 아니었다. 원초적 환상이라거나 유전적 기억이라거나 그런 것도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기억의 유전’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가 본 것을, 혹은 엄마가 상상한 것을, 엄마가 들어 떠올린 것을 내가 물려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넌 나의 꿈이야, 나는 엄마의 꿈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엄마의 기억 하나 정도는 물려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4월 16일, 나는 한 선생님의 부친상 조문 후 일행과 광화문엘 갔다. 노란 조명, 바닥으로 쏟아지는 전광판의 빛, 수신호를 보내는 경찰과 보도블록을 가득 메운 건널목의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 교보빌딩 앞 라일락 냄새가 내 코로 강렬하게 들이닥쳤다. 그 향기는 국화 냄새와 완벽하게 같았다. 나는 어, 어, 밀려드는 생각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2호선을 타기 위해 시청으로 향했다. 구 시청 청사 앞에서 일렬로 피켓을 들고 선 고등학생들을 보았다. ‘안아 드립니다’가 아니라 ‘안아 주세요’.

지하철 입구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두 개의 시청 건물 앞에서, 플라자 호텔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가득 찬 시청광장에서, 나는 텅 비어 버린 유년의 로터리를 보고 있었다. 보고 말았다. 나는 거의 얼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았을 것이고, 여느 때처럼 농담을 하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과 순간, 지난 2월 이후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그것은 여전히 문학적인 죽음과 삶 사이에서 파생된 감정이거나, 생생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감정은 글을 쓸 수 있겠다,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 글을 쓰고 싶어, 였으며 다른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이것이 이 글의 끝이 되리라 예감했다.

텅 빈 시간 동안, 나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한 남자를 만나기를 완전하게 그만두었다. 환심을 사지 못해 안달한 내가 더는 없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없었다. 놀랍게도 난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꿈꾸지 않았다. 내 삶이 가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지 않은 첫해였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쓰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노스탤지어가 아니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쓰일 수 없는 내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 써야 했다.

2014년 봄과 2015년 봄, 나에게서 사라진 무언가를 나는 썼다. 이것은 ‘내’가 쓰기에 Auto이며, 내가 ‘쓰기’에 Fiction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소설#a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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