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새 성장판 열어라]<5>대기업 위주서 벤처로 달라지는 성장공식
[2016 연중기획]
《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828m)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중국 베이징(北京) 올림픽 주경기장, 한국의 광안대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국의 공학기술용 소프트웨어(SW)가 탑재됐다는 점이다. 건축물과 교량 등을 안전하게 짓기 위해서는 바람,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에 안전한지 미리 검증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용 공학 SW가 필요하다. 전 세계 110여 개국에 이 SW를 수출하는 기업은 한국의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인 ‘마이다스아이티’다. 2000년 매출 15억 원, 직원 20명에서 시작해 지난해 직원 600여 명에 약 8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
지난 50여 년간 한국 경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압축 성장을 해왔지만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공 공식’이 깨지고 있다. 전자와 자동차 기업들은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고, 조선 철강 해운 분야 대기업들은 적자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제 소수의 대기업이 한국 경제를 끌고 나갈 게 아니라 마이다스아이티 같은 기술 중심의 중소·벤처기업들이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갈 때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기업들은 경영 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성장에 비례해 고용을 늘리는 특징도 있다. ○ 한국판 핏비트, 샤오미 나와야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과 중국에서는 최근 스타 기업들이 대거 배출됐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핏비트(fitbit)’는 지난해 애플과 샤오미를 제치고 글로벌 웨어러블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7년 5월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박과 에릭 프리드먼이 공동 설립해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핏비트는 8년 만에 시가 총액 8조 원대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자 웨어러블 디바이스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IT 기업 ‘샤오미(小米)’는 창업 5년 만에 시가총액 54조 원인 거대 기업이 됐고 드론 전문기업 ‘DJI’도 전 세계 민간용 드론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핏비트의 최고경영자(CEO)인 제임스 박은 핏비트를 창업하기 전 미국 하버드대 컴퓨터교육과를 중퇴하고 투자회사인 모건스탠리의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회사를 창업하면서 한 가지 기기에만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건강과 헬스케어 기기인 핏비트의 스마트밴드 제품 연구개발에 주력해 성공을 거뒀다. DJI의 CEO인 왕타오(汪滔)는 2006년 대학원생 시절 동기들과 창업한 뒤 자체 기술력 개발에 매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면서 과거보다 창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의 청년들은 아직 창업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한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생 가운데 창업을 희망한 경우는 6%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41%나 됐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창조경제 바람이 불면서 한국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벤처기업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마이다스아이티도 그중 한 곳이다. 2000년 설립된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히든 챔피언’이다. 이곳의 올해 매출 목표는 1000억 원이다.
‘N15 스타트업 빌더’도 주목받는 벤처기업이다. N15의 공동 창업자 네 명은 모두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대기업 입사 대신 창업을 택했다. N15는 아이디어 구상부터 시제품 제작, 유통 및 마케팅 단계까지 국내 하드웨어 기반 스타트업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는 창업 지원 기업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하드웨어 창업가들의 놀이터’로 불리는 ‘테크숍’과 한국 내 라이선스 운영에 대한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테크숍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갈 최고의 제조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갖춘 곳”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 기업 생태계 역동성 높여야
중소기업청과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1000억 원을 넘긴 벤처기업은 460개로 조사돼 전년(453개) 대비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 많은 벤처기업들을 중견기업에 이어 대기업으로 키우려면 체계적인 기업가정신 교육을 통해 CEO로서의 역량을 길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미국의 많은 CEO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직접 하고 일부러 우버를 타 본다”며 “한국의 리더들도 새로운 산업이 사회에 미치는 효과를 눈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와 사회 전반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IT에 친숙해지고 작은 회사가 만들어낸 상품을 직접 사용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대기업과의 협력 및 동반 해외 진출 등 상생 모델을 통해서도 스타 기업을 육성할 수 있다. 김성섭 중소기업청 벤처정책과장은 “대기업이 벤처 및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수혈하고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인수합병(M&A)이나 투자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 기업의 탄생을 방해하는 규제는 과감히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미국의 ‘스퀘어’는 포스 단말기가 없어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있으면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해 모바일 결제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스퀘어로 결제한 후에는 영수증을 출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국에서는 종이 영수증을 발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관련 서비스를 선보일 수 없다. 임 센터장은 “국내 스타트업의 창업 아이디어가 각종 규제에 묶여 제한적”이라며 “규제를 걷어내야 성공하는 스타트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벤처기업 천국’ 美선 어떻게… ▼
초기자금 모아주고 기술-시장성 검증, 든든한 ‘창업 보육’
미국은 ‘벤처기업의 천국’으로 불린다. 구글, 애플 등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신생 벤처기업이 탄생하고 있다. 비결이 뭘까.
우선 우수한 보육 환경을 들 수 있다. 민간 주도로 만든 벤처육성기업인 와이콤비네이터(Y-Combinator)가 대표적 예다. 와이콤비네이터는 벤처기업인들에게 단기 교육 프로그램(6개월 내외)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 구축, 투자 유치 등을 도와준다. 5일 현재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스크라이브드, 범프 등 946개사가 와이콤비네이터를 거쳐 갔다. 그 기업들은 지금까지 74억2457만 달러(약 8조8352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153개사는 22억8380만 달러(약 2조7177억 원)의 가치를 평가받고 매각되기도 했다. 와이콤비네이터 외에도 테크스타스(Techstars), 500스타트업스(500Startups), 드림IT 벤처스(DreamIT Ventures) 같은 다양한 벤처기업 보육 회사들이 있다.
자금 조달도 쉽다. 한국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려면 주로 아파트 등을 담보로 해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국에선 벤처기업인들이 사업계획서를 발표하고 벤처캐피털(VC)로부터 투자금을 지원받는다. 그 경우 사업에 실패해도 기업인 자신이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지 않는다.
미국 벤처캐피털협회(NVCA)에 따르면 미국 기업형 벤처투자는 2011년 23억6500만 달러(약 2조8144억 원)에서 2015년 64억500만 달러(약 7조6220억 원)로 크게 증가했다. 벤처투자사들은 최근 단순 자금 지원을 넘어 스타트업의 성공 가능성 자체를 높이기 위한 기술 검증, 사업화 지원 등 실질적 지원까지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창업에 우호적인 미국 특유의 문화를 꼽을 수 있다. 임애린 500스타트업스 이사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에선 일면식이 없는 경영자에게 무작정 연락해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문화가 벤처 기업을 끝없이 탄생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신수정 crystal@donga.com·곽도영·서동일 기자 신무경 기자 fight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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