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견이든 공론의 장에 올려 찬반토론을 벌이면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일, 민주주의 사회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돼야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되고 있다. 2015년 11월 서울 연세대 한 전공 수업 조모임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일이다. 재학생 이모(24) 씨는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이 ‘역차별’을 받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같은 조원으로부터 “혹시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하세요?”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이씨는 “강의실이든 어디든 학교에서 정치적 소신을 드러냈다간 낙인찍힌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절감했다. 이후 입을 닫고 산다”고 말했다. 대학생 가운데 보수우파성향을 가진 학생이 적잖지만 이들 대다수는 이씨와 같은 이유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는 편이다. 연세대 재학생 김모 씨도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때 도심 불법시위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 ‘일베충’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보수 목소리 낼 거면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침묵에 빠진 상아탑2015년 2학기 서울 한 대학 강의실에선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이 보는 신문을 가져와 기사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여러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렸다. 수강생 H(23) 씨도 준비해온 신문을 꺼냈다. 수강생 20여 명 가운데 오직 그가 가져온 신문만 진보성향 신문이었다. 강사가 그에게 “진보성향인가요?”라고 묻고는 지나갔다. 그는 이 일로 적잖은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을 뺀 다른 수강생은 수업 담당자의 정치적 성향을 이미 파악해 거기에 맞게 대처한 반면, 자신만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후 그는 과제를 할 때 정치적으로 중립 논조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학점을 잘 받으려면 내 성향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러 대학생은 “서울시내 대학들에서 강의시간에 ‘음소거’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생들은 교수 말에 토를 일절 달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고 오직 받아 적기만 한다”고 전했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돼야 할 상아탑이 침묵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는 것. 자신의 생각이 주위 다수 의견과 다르다고 느끼면 스스로 발언을 포기한다. 취재 결과, 서울시내 여러 대학에선 특정한 정치 견해를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했다.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이 113개 대학 재학생 3861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수성향 학생과 진보성향 학생은 각각 16.5%와 16.2%로 비슷했다. 그러나 서울시내 대학에 붙은 대자보 중 우파 목소리를 담은 대자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체로 강의실이나 사적 모임에서도 학생들은 보수성향 발언을 기피했다. 그렇다고 양심에 반하는 말도 할 수 없으니 아예 침묵하는 것이다. 반대로 교수나 강사가 보수성향이면, 학생들은 진보성향의 발언이나 글을 극도로 자제했다. 2015년 9월 의경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서울 모 대학 재학생 손모 씨는 학과 동기들과 술자리에 참석했다. 동기들은 경찰의 시위대 과잉진압을 맹렬히 비판했다. 손씨는 폭력시위도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손씨는 “정부 편을 들면 교우관계가 금이 갈 게 뻔하다”고 말했다. 서울 모 대학 총학생회 소속 하모(23) 씨는 최근 학생회 활동을 접었다. 총학생회 내부에서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체 반대’ 대자보와 성명 발표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때 하씨는 성명 발표를 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 주변의 빈축을 샀다. 이후 하씨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진보 목소리에 치여 살았다고 한다. 사안에 따라선 진보성향 학생들의 표현도 억압됐다. 2014년 한국항공대 총학생회의 한 학생이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학내에 붙였다. 그날 밤, 포스터는 뜯겨진 채 불태워졌다. 포스터가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총학생회장 정모(25) 씨는 유가족 집회에 갔다 학내에서 ‘운동권’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서울시립대 재학생 박모(22) 씨는 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많다. 세월호 참사 관련 촛불시위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시위에 참가했고 고교 친구들과 만나면 늘 정치토론을 한다. 그러나 대학 내에서 박씨가 입을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14년 6월 서울시장 선거 유세가 한창일 때 박씨는 과 소모임에 참석했는데 여기서도 대화의 대부분이 선거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여당 후보를 지지하던 선배들이 박씨에게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물었고 박씨가 야당 후보 이름을 대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가라앉았다. 이어서 선배들은 야당 후보를 욕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후로 학내에선 절대 정치적 소신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만연한 획일화 역풍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모(24) 씨가 속한 모 대학 건축사회환경공학부 12학번 단체 카카오톡방은 통진당과 좌파를 욕하는 글로 가득했다. 자신을 진보에 가깝다고 여긴 김씨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모습에 놀랐다. 그는 동기들에겐 어떠한 개인 의견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교수가 학생의, 학생이 교수의 입을 막기도 한다. 서울시내 한 대학에 다니는 지모(23) 씨는 지도교수와 학생들 모임에 나가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도교수가 정부를 비판하면서 “내 제자 중엔 우파성향 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은 “취업난 때문에 학점을 주는 교수 권위가 더 높아졌다. 강의실 안팎에서 학생은 교수의 성향에 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간혹 학생들이 교수의 입을 막으려고 하기도 한다. 2015년 11월 고려대 인터넷 게시판에는 N교수의 수업 녹취록을 구하는 글이 올라왔다. N교수는 수업 도중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교과서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몇몇 학생이 녹취록을 구해 N교수를 압박하려 한 것이다. 정치 성향과 무관한 주제라 해도 주류와 다른 의견을 개진하기란 쉽지 않다. 페미니즘이 강한 서울 모 대학 사회과학대에서 벌어진 일은 전설처럼 대학가를 떠돈다. 한 학생이 과학생회 방에서 “축구하러 가자”고 했다가 “여학우들을 소외시키는 발언”이라고 공격받은 것. 이 대학 재학생 고모 씨는 “(우리 학과에선) 여성주의에 반대되는 그 어떠한 발언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상 최대의 취업난 속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잔뜩 움츠린 요즘 대학생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소신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채 젊음의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강요하고 있다. 그 대신 다수와 결탁하고, 침묵에 안주한다. 바야흐로 자유의 상아탑에 시대착오적 획일화 역풍이 불고 있다.
한승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pye0611pye@naver.com 박예은 고려대 미디어학부 2학년 hswwsh1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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