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롯데가(家)가 최근 또 다른 일로 주목받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이 서울가정법원에 신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성년후견 개시 심판청구)을 한 것. 2013년 7월부터 시행 중인 성년후견인제도는 과거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제도를 대체한 것으로 질병, 장애, 노령 등의 이유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운 성인을 위해 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하는 것이다. 피후견인을 사회에서 배제, 격리하는 성격이 강했던 과거 제도와 달리 피후견인의 의사와 남은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후견인이 재산뿐 아니라 치료, 요양 등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성년후견인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해마다 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통계에 따르면 시행 첫해 월평균 30건 수준이던 신청 건수가 2014년 50건, 2015년 70건으로 늘었다. 지적장애인인 딸 A씨를 둔 60대 초반 B씨의 사례는 이 제도의 의의를 보여준다. 수십억 원대 자산가였던 B씨가 사망하자 A씨의 시동생은 유산을 노리고 형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B씨의 동생이 조카를 위해 법원에 후견인 지정 신청을 하면서 한 변호사가 후견인으로 지정됐고, 시동생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은 본인, 배우자, 4촌 이내 친족이 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검사가 하는 것도 가능하다. 청구인은 원할 경우 스스로 후견인이 될 수 있고 후견인 후보를 추천할 수도 있다. 2015년 9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30억 원대 자산가 C씨를 위해 법원에 성년후견인 지정 신청을 했다. 80대 중반의 C씨가 치매를 앓자 딸이 아버지와 중증정신장애를 앓는 오빠를 요양병원에 가두고 재산을 독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건 전말이 알려진 건 한 통의 진정서 때문이었다. C씨 소유의 상가 건물 세입자와 이웃들이 건물주인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걸 이상하게 여기다 갑자기 딸이 나타나 건물을 매각하자 이를 수상히 여겨 검찰에 진정서를 낸 것이다. 성년후견인제도를 이용하려면 청구인이 법원에 성년후견 개시 심판청구서를 내야 한다. 법원은 사건 본인(장차 피후견인)과 청구인 외 후견인 후보, 사건 본인이 사망했을 경우 상속자가 되는 잠재적 상속인 등 이해관계인을 모두 불러 적합한 후견인이 누구인지, 청구인 또는 후견인 후보 가운데 특정인이 성년후견인이 되는 데 동의하는지 등을 확인한다. 이해관계인 사이에 후견인 자리를 놓고 다툼이 있으면 조사관을 파견해 적절한 예비 후견인을 가린다. 사건 본인의 정신감정을 위한 절차도 함께 진행한다. 이에 따라 후견 개시까지 짧게는 3개월, 길면 1년 정도가 걸린다. 종종 법정에서 잠재적 피후견인을 놓고 형제 등 이해당사자가 서로 후견인이 되겠다며 다투는 사례도 발생한다. 70대 중반 건설업체 사장 D씨는 약 10년간 사귀어온 50대 여성 E씨와 2013년 혼인신고를 했다. 얼마 후 D씨가 치매진단을 받자 차남이 법원에 아버지와 E씨의 혼인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를 냈다. 이후 D씨의 장남과 차남, E씨 세 사람은 각각 자신을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E씨는 차남이 회사 경영권과 재산을 노리고 자신을 상대로 혼인무효 소송을 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 세 사람 대신 제삼자인 변호사를 성년후견인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년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친족인 경우가 많다.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이 비율이 87%에 달한다. 문제는 일부 성년후견인이 ‘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피후견인 사망 후 상속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원이 부모를 봉양한 자식에게 기여분을 인정해주는 것을 노리고 후견인이 되려는 자녀가 있다. 친척이 후견인이 돼 피후견인의 재산을 횡령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우리 형법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등 가까운 친족 사이에 재산 범죄가 발생할 경우 처벌하지 않는 이른바 ‘친족상도례’ 규정을 두고 있어, 친족인 성년후견인이 재산 횡령 등을 저지를 경우 피후견인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성년후견인에 의한 재산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처벌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윤홍근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성년후견인은 법원에 의해 공적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친족후견인에 한해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은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친족상도례 예외 인정해야”제도적, 법적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또 있다. 국회의원 시절 민법 개정을 통한 성년후견인제 입법을 주도했던 박은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후견인에 대한 보수는 원칙적으로 피후견인 재산에서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비용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공공후견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보건복지부에서 취약계층 발달장애인의 공공후견인 비용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법원에 후견인 지정 신청을 하면 심판청구에 소요되는 일반비용(인지대, 송달료 등) 외에 병원 감정비용 등이 필요한데,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제적 취약계층은 ‘절차 구조’ 신청을 통해 국가로부터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다. 김태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또 다른 보완을 제안했다. “현재는 법원이 후견 개시 결정을 한 뒤 14일 안에 청구인이 항고하지 않아야 효력이 발생한다. 그런데 청구인 자신이 후견인이 되지 못하면 불만을 품고 14일 안에 청구를 취하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 성년후견 개시 심판청구 자체가 무효가 되므로 일단 법원 결정이 나면 청구인이 신청 취하를 못 하도록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핵가족 및 1인 가구 증가와 더불어 고령화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불안한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줄 현실적 대안으로 성년후견인제도를 활용하려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윤홍근 변호사는 “집을 사려면 부동산중개소에 가듯 후견인이 필요하면 누구나 쉽게 찾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며 “현행 법규에는 개인뿐 아니라 법인도 후견인이 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지만 후견인이 될 수 있는 법인 기준조차 정해진 게 없다. 후견 업무를 맡을 법인 설립이 가능하도록 법적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성년후견인제도에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킨 롯데가 사안의 경우, 마무리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 견해다. 성년후견인을 지정하려면 법원이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재산 명세를 전부 파악해야 하는데, 그의 재산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나뉘어 있는 데다 그간 알려진 것처럼 지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전모를 알아내기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또 신 총괄회장에게 후견인이 필요한지 파악하려면 정신감정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밝혀온 신 총괄회장이 이를 거부할 경우 강제할 방법이 없다. 법조인들은 “이번 사건으로 신 총괄회장의 재산이 낱낱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 롯데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할 테고, 심판 과정에서 법원의 각하를 이끌어내거나 청구인의 취하를 유도하는 등의 방식으로 후견인 지정이 무산되게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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