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온 엄마 윤혜진, 다시 발레리나로 턴

  • 여성동아
  • 입력 2016년 1월 20일 15시 37분


발레가 삶의 전부였던 이에게 부상으로 떠나야 했던 무대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배우 엄태웅의 아내로, 딸 지온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도 행복했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몸을 만들며 복귀 준비를 해온 발레리나 윤혜진이 마침내 다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배우 엄태웅의 아내이자 KBS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낳은 꼬마 스타 엄지온의 엄마로 대중에게 각인돼 있는 윤혜진(36)은, 결혼 전 ‘춤추는 실루엣이 가장 예쁘다’는 평을 들으며 국립발레단에서 촉망받던 수석 무용수였고, 2012년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 발레리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상과 결혼, 출산이 이어지며 무대를 떠나 있던 그녀가 최근 국립현대무용단 송년 레퍼토리 ‘춤이 말하다 2015’(12월 8~13일)로 3년 만에 무용수로 돌아왔다.

12월 10일 가수 엄정화도 동생 엄태웅과 함께 윤혜진의 복귀 무대를 찾았다. 엄정화는 이날 받은 감동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드디어 우리 혜진의 공연을 보았다. 오랫동안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자 노력했던 시간,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고된 시간들, 이제는 또 지온이의 엄마로 한 사람의 아내로 변화하는 시간 안에서도 결국 춤의 열정을 놓지 않고 멋지게 무대로 복귀한 모습, 정말 춤이 말해준 무대, 자랑스럽고 멋지고 감동적인 무대. 박수를 보낸다~ ‘춤이 말하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지온이 엄마 최고!”

20년의 삶을 온전히 바쳤던 발레

온 가족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무대에 복귀한 윤혜진을 공연 개막을 하루 앞둔 12월 7일, 의상 리허설 현장에서 만났다.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발레리나 몸매로 돌아간 그녀는 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벅찬 감회를 숨기지 않았다.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니 설레고 기쁘네요. 행여 실수할까,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는데 공연을 보신 분들이 하나같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몰라요.”

윤혜진이 발레를 배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니 아이에게 운동을 시켜보라는 담당 의사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어머니가 발레를 권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시작이 많이 늦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더 열심히 배우며 몸의 움직임을 즐긴 덕분에 그녀는 2002년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그해 ‘호두까기인형’ 마리로 주역 데뷔할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계적인 천재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엣과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어머니 레이디 캐플렛 역을 맡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춤을 좋아하지만, 클래식 발레를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제 몸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과 아쉬움이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시키는 것들을 따라만 하는 입장이었지, 자기만의 표현과 해석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마이요의 안무는 그런 방식과 너무도 달랐어요. 토슈즈를 벗고 춤을 췄고, 키스를 하는 장면에선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닌 디프 키스를 했어요. 마이요는 연기를 가식으로 하지 말고 리얼로 하라고 강조했어요. 그때 드라마 발레를 처음 접하면서 오롯이 춤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 마이요 작품 안에서 한 캐릭터가 돼서 춤춰보고 싶은 바람을 떨칠 수 없었어요.”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당시 20대 초반이던 그녀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뭣도 모르고” 마이요가 몸담고 있는 모나코의 발레단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 그녀는 뜻을 이룰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디션장에 갔더니 그곳의 무용수들은 편한 트레이닝 바지에 티를 입고 있었어요. 머리도 망으로 예쁘게 꾸민 게 아니라 쇼트커트였고요. 근데 그 안에 핑크 공주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게 저였어요. 정말 잘 보이겠다고 무용복 전체를 핑크색으로 맞추고 타이츠도 신고 예쁜 머리핀까지 꽂았던 거 같아요. 그러고 딱 서 있는데 제가 봐도 그들과 너무도 동떨어진 무용수더라고요. 감히 오디션을 보러 왔다 얘기도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내가 나를 변화시켜서 꼭 여기 다시 온다’고 다짐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죠.”

그때부터 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바뀌었다. 막연히 춤만 춘 게 아니라 무용수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데 열중하며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모나코에서 오디션을 한번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나이도 서른두 살이 되어 있었다. 무용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랜 꿈을 이루려고 전 세계 베테랑 무용수 수백 명이 몰려드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 오디션에 도전했다. 행운의 여신은 이런 그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합격의 영광을 안겼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2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마지막으로 국내 고별 무대를 갖고 모나코로 떠난 그녀는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두 달도 안 돼 한국으로 돌아온다.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의 첫 한국인 발레리나이니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좀 과욕을 부린 게 화근이었어요. 예전에 처음 해보는 탭댄스를 추다가 아킬레스건에 고질병이 생겼는데 춤 연습을 하다 그 부위가 심하게 삐끗했죠. 발레단에 의료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다치자마자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걷지도 못하게 하더라고요. 당시 비자를 받은 상태가 아니라서 한국에 한번 다녀와야 했고, 마이요도 ‘어차피 비자 받으러 가야 하니 치료하고 다시 돌아와라. 기다려주겠다’고 해서 한국으로 다시 온 거예요. 그런데 제 발 상태를 본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저 역시 몸의 상처만큼 마음에도 정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것 같아요.”

국립현대무용단 송년레퍼토리 ‘춤이 말하다 2015’로 3년 만에 무용수로 돌아온 윤혜진은 그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유연하고 역동적인 몸짓을 보여줬다.
국립현대무용단 송년레퍼토리 ‘춤이 말하다 2015’로 3년 만에 무용수로 돌아온 윤혜진은 그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유연하고 역동적인 몸짓을 보여줬다.



춤추는 엄마의 성장통, 산후 우울증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한 이는 바로 지금의 남편 엄태웅이다. 결혼과 발레 사이에서 갈등하던 윤혜진은 “발레단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아 고민을 거듭하던 차에 지온이가 생겼고, 운명처럼 답이 내려졌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2013년 1월 엄태웅과 결혼해 6월 딸 지온을 낳았다. 결혼 5개월 만에 엄마가 되자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3년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여자로서의 삶은 행복했지만 출산 후 한동안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무용수로서 윤혜진은 없어진 것 같고, 무용을 더는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결혼하기 전까지 발레는 제 삶의 전부였어요. 할 줄 아는 것도 발레밖에 없었고, 하는 일도 발레밖에 없었으니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었는데, 자식이 생기니 모성애가 더 크게 자리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이제는 아이가 눈을 감고 뜨는 시간이 제가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되고, 눈떠서 제일 먼저 가는 곳이 부엌이에요.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가족에게 제가 잘하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만들어주고, 또 맛있게 먹어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절로 배가 부르더라고요. 저는 그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식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발레를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모르게 몸을 관리하고 있었던 거예요. 출산 후 체중이 많이 불었는데 이대로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면 진짜 무용수의 삶이 끝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탄수화물을 피하고, 무조건 굶기도 하면서 예전의 몸무게를 회복했죠.”

몸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진다. 길을 가다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자세가 틀어져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교정하는 것도, 차례상에 올릴 전을 부칠 때마다 시집 식구들에게 “다리 좀 벌리고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한 뒤 다리를 180도로 쩍 벌리고 앉는 것도 그에겐 예사다.

“쉬는 동안 몸이 많이 변했어요. 골반이 더 벌어졌다는 게 느껴져요. 2년 전부터 다시 발레 연습실에 나가 유연성을 키우고 있는데 원상태로 돌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떼어놓는 것도 힘들어요. 연습실에 가려고 하는데 아이가 귀신같이 제 잠옷을 찾아와서는 나가지 말라고 울며 애원할 때면 ‘내가 공연할 것도 아니고, 고작 한두 시간 연습하려고 이렇게까지 모질게 해야 하나’ 싶죠. 그러면서도 또 운전하고 가고 있더라고요.”

그간 여러 단체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개인 사정으로 복귀하지 못하다 ‘춤이 말하다’로 비로소 컴백한 그녀는 “수명이 짧은 발레리나의 세계에서 출산 후에도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보다 많은 무대에서 관객 만나고 싶어

“집에서는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랑 놀아주고 집안 살림도 하는, 평범하지만 바쁜 아줌마의 일상을 살고 있어요.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아직은 무대로 돌아가야 할 무용수다’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제가 이런 무대에 설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제가 봤을 땐 3~4년 정도일 텐데, 그사이 보다 많은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게 저의 큰 바람입니다. 무대를 떠나 있으면서 몇몇 작품들이 그렇게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제가 연기한 줄리엣의 엄마 역 레이디 캐플렛이에요. 두 원수 집안의 싸움으로 인해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로미오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 딸의 마지막 순간을 캐플렛이 확인하는 장면이 있어요. 사랑하는 딸이 생기니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지금 그 춤을 다시 춘다면 캐플렛의 심경과 감정을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복귀 무대를 통해 처음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의 조화를 선보인 그녀는 “현대무용가와의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면서 “이제는 무용수로서 연륜을 보여줄 수 있고, 감정을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춤을 추고 싶다. 전통발레보다는 모던발레나 조금 더 변형된 움직임을 추구하는 안무가를 만나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첫인상에서 풍기던 차가운 이미지와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며 이런 느낌을 털어놓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에요. 다들 그런 선입견을 조금씩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이번 무대가 저라는 사람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믿어요(웃음).”


글 · 김지영 기자 | 사진 · 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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