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종훈]분노사회와 화병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6일 03시 00분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신문 만드는 일에 20년 넘게 종사하고 있지만 요즘처럼 신문 보는 게 불편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통제하기 힘든 분노다.

인천에서 11세 소녀가 아버지와 동거녀에 의해 3년간 학대받다가 탈출한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부천의 최모 씨라는 인간이 아들을 구타해 숨지게 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냉동고에 3년 넘게 보관해온 사건이 발생했다. 90kg의 건장한 성인이 16kg에 불과한 뼈밖에 남지 않은 7세짜리를 권투하듯 때렸는데 “이렇게 때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때렸다”고 말했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나.

범죄행동분석관이 이 악마 같은 인간을 조사해보니 공격적인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Anger disorder)를 발견했다고 한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아들을 기르면서 생긴 스트레스와 분노를 자식을 때리며 해소했다는 것이다. 계속된 학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여동생보다 몸무게가 덜 나갔던 이 불쌍한 아이가 걸린 ADHD는 주의력이 부족하고 산만하며, 활동이 과다하고 충동적 행태를 지속적으로 보이는 병이다. 보통 어린이의 6∼8%가 앓고 있고 심각하지 않은 경우까지 합치면 13%에 이르는 흔한 질환이다.

21일 경기 광주시에선 또 다른 최모 씨가 부인과 자녀 2명(18세 아들과 11세 딸)을 망치로 때려 숨지게 하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우울증 치료를 받아온 최 씨에게도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다.

도대체 분노조절장애가 뭔가. 책을 찾아보니 화를 참지 못해 엉뚱한 대상에게 화를 표출하거나 자해를 하기도 하는데 흔히 울화병(鬱火病) 또는 화병(火病)이라고 한다. 정신건강의학 분야 명저(名著)인 ‘최신정신의학’(대표저자 민성길)에 따르면 화병은 반복되는 불공평한 사회적 처사 때문에 화가 나는 것, 억울하고 분한 것, 한스러운 것, 속상한 것, 스트레스, 정신적 상처 등을 오래 참다 생기는 병이라고 써 있다. 화병의 원인인 복합적 분노는 외부의 부당한 폭력과 억압, 좌절과 열등감, 빈부 격차, 정의롭지 못한 처사에 대한 반응 등으로 생긴다. 한국의 전통적인 권위적이고 억제적인 문화가 그 배경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노를 조절하기 힘든 수많은 일상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영철 교수는 “분노조절장애는 각종 스트레스가 누적되면서 분노를 비롯한 감정 조절이 잘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이고 알코올의존증, 전두엽 치매, 뇌혈관 질환, 성격장애를 동반한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자. 출근길부터 퇴근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떤 분노의 그물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나. 층간 소음, 난폭 위협 운전, 과도한 신체 접촉, 뻔뻔한 새치기 같은 흔한 일상들은 어떤가. 이런 ‘공기(空氣)’ 같은 분노들이 살인죄의 원인이 된 지 오래다. 하루 24시간 분노사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는 한 걸까.

‘최신정신의학’은 상황에 맞게 분노를 감소시키거나 조절하는 기술을 학습으로 배우는 인지행동치료, 병을 제공한 가족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가족치료, 사회기술과 의사소통기술을 훈련시키는 정신사회적 치료, 약물 치료 등이 대표적인 화병의 치료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쌍한 어린 생명은 이미 세상에 없는데 이런 치료법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살인죄로 처벌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냥 참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정말 화가 치민다.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아동 학대#분노조절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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