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깊은 잠 깬 비단벌레 장식… 영롱한 빛깔에 숨이 멎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3일 03시 00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회> 황남대총 발굴 주역 최병현 교수


《 중국 뉴허량(牛河梁) 홍산문화박물관에 가면 주 전시관 입구에 고고학자들의 인물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홍산문화 발굴과 연구에 기여한 수빙치(蘇秉琦), 궈다순(郭大順) 등의 업적을 기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적, 유물만 강조될 뿐 정작 그것들을 땅속에서 찾아내 생명력을 불어넣는 고고학자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광복 이후 첫 발굴인 경주 호우총 발굴 7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과 함께 발굴 현장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를 싣는다. 》

1975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 최병현(맨위 사진 오른쪽)과 1일 황남대총을 다시 찾은 모습. 그는 “벌써 40년이 넘었지만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75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 최병현(맨위 사진 오른쪽)과 1일 황남대총을 다시 찾은 모습. 그는 “벌써 40년이 넘었지만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누가 이따위로 땅을 팠어!”

1973년 5월 경주 천마총 발굴 현장. 당시 김정기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불호령에 26세 청년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두 달 동안 봉토를 걷어낸 끝에 드러난 석렬(石列)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호통에 청년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웬만하면 흥분하지 않는 김 단장이었기에 더 부끄러웠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발굴단에 합류했던 청년은 그날 밤 근처 합숙소로 돌아와 몰래 보던 서양사 원서를 책상에서 치웠다. 그러고는 일제강점기부터 당시까지 발간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보고서를 전부 찾아서 읽었다. 그는 그해 천마총 발굴에 이어 곧바로 황남대총 발굴에 투입돼 현장 인부들을 감독했다. 한때 서양사학자를 꿈꿨던 청년은 39년 뒤 비명문대 출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돼 한국 고고학계 석학으로 우뚝 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68)의 이야기다.

○ 비단벌레 장식, 1600년 만에 빛을 내뿜다

1975년 8월 중순 경주 황남대총 남쪽 무덤. 목곽 안에서 말띠드리개(행엽·杏葉)와 더불어 엎어진 채 땅에 묻혀 있던 안장 뒷가리개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최병현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직접 꽃삽과 대칼(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발굴 도구)을 잡았다. 흙을 걷어낸 뒤 안장을 살짝 들춰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1600년 동안 깊은 어둠 속에서 발하던 영롱한 빛이 그의 눈에 잡혔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일일이 뜯어내 붙인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였다.

발굴 현장은 순식간에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이미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비단벌레 장식 파편을 발굴해 본 경험이 있어서 이 유물이 얼마나 빛과 습도에 민감한지 최병현은 알고 있었다. 즉시 커다란 솜에 물을 묻혀 장식 위에 덮고 발굴을 중단했다.

화학을 전공한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김유선은 비단벌레 날개 시료를 서울로 가져가 보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가 고군분투한 1주일 동안 유물은 물에 젖은 솜을 뒤집어쓴 채 고스란히 무덤에 묻혀 있었다. 마침내 햇볕을 차단한 채 글리세린 용액에 빨리 담가야 한다는 지침이 떨어졌다. 최병현은 유물을 무덤에서 꺼내 나무상자에 넣은 뒤 글리세린을 부었다. 한 사람이 발굴부터 유물 보존처리까지 맡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뜯어서 붙인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1975년 8월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뜯어서 붙인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1975년 8월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황남대총 발굴, 그 명과 암

황남대총은 길이 120m, 너비 80m, 높이 23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 무덤이자 대표적인 신라 적석목곽분이다. 규모에 걸맞게 5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신라 고분에서 최대 발굴로 손꼽힌다. 당시에는 고고학 분야 석학이던 삼불 김원룡(1922∼1993)조차 경주 황오리의 소형 고분만 발굴해 본 정도였다. 김정기를 단장으로 김동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병현으로 이어진 발굴팀은 당시 고고학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걸은 셈이다.

최병현은 황남대총 등 여러 발굴을 통해 신라 적석목곽분이 서기 4∼6세기 마립간의 무덤임을 규명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신라 적석목곽분의 상한 연대를 5세기로 내려본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탈피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최 명예교수는 4∼5세기 경주 일대를 제외한 낙동강 동부 지역이 가야 영토라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토기 유물 등을 통해 실증적으로 고증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최병현은 “지금이라면 황남대총 발굴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국 고고학 초창기였던 당시, 정부에 의해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됐다. 천마총과 달리 황남대총 발굴은 급하게 진행돼 토층도조차 그리지 못할 정도로 봉토 조사 등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고 칠기와 금속 등 유물 손상을 막지 못했다. 다음은 최병현의 회고.

“김 단장은 당시 ‘현 수준에서 황남대총 발굴은 겁 없는 짓’이라고 했다. 당시 고고학 수준이 미흡한 상황에서 황남대총을 파면 도리어 유물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발굴을 주저했다. 천마총에서 유물이 꽤 나오면 황남대총까지 파지 않아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황남대총은 지금이라면 발굴에 최소 10∼15년이 걸릴 현장이었다. 신라 고분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줬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단벌레#황남대총#최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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