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의 4차 핵실험 며칠 전인 작년 말 북-미 간 평화협정에 대해 비밀리에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1일(현지 시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해야 6·25전쟁을 공식 종식하기 위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기존의 전제조건을 포기하고 비핵화를 포함해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며 북한은 이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먼저 논의를 제안한 것은 북한”이라고 밝혀 보도 내용을 사실상 시인했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17일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을 제의한 바 있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우선이라며 일축했지만 미국이 이미 뒤로는 북한에 동시 협상을 제안했다는 것은 중대한 입장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외교부가 어제 왕 부장의 23∼25일 방미를 발표하며 “중국이 제안한 비핵화-평화체제 전환 논의를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심상치 않다. 어제 한국 외교부가 “한미는 북한과의 어떠한 대화에서도 비핵화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밝힌 해명이 공허해 보일 정도다.
비공식적 논의라지만 북-미 간 논의가 오갔다는 것도 몰랐던 게 아니냐는 의혹에 정부는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가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감도 잡지 못했다면 더 위험하다. 일각에선 작년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 등 중국 경사 외교의 후폭풍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미중(美中)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는 나라’라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자랑만 믿고 있다가 중국에 뺨맞은 데 이어 미국에도 뒤통수를 맞은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한반도 평화협정이란 북한이 1974년 미국 의회에 “남조선에 있는 외국 군대는 일체 무기를 가지고 철거해야 한다”며 조-미(朝-美)평화협정을 제안한 이래 끊임없이 요구해온 사안이다. 한국을 배제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을 쓰면서 북한이 미국과 대등한 핵보유국 자격으로 협상하자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협정으로 보장한다는 데 무엇이 문제냐며 국내서도 동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평화협정의 핵심은 유엔사 해체와 북-미 수교다. 북의 주장대로 평화협정을 먼저, 또는 비핵화와 동시에 체결한다면 한국은 북핵을 그대로 머리에 인 채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에 대한 강한 제재를 끌어내기 위해 어느 때보다 물샐틈없는 한미공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를 협의하는 마당에 정부는 미국에 긴밀한 대북 공조를 요구해야 마땅하다. 안보 위기도 위기지만 외교당국의 위기가 국민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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