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공화당이 정체불명의 트럼프주의(Trumpism)에 압도당하며 혼돈에 빠졌다. 트럼프주의는 아웃사이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70)의 높은 인기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 “트럼프의 공약이나 발언을 뜯어보면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그가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너무 커졌다”고 보도했다. 1980년대 이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뉴햄프셔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모두 이긴 후보가 최종 후보가 안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공화당 지도부가 ‘공화당 후보답지 않은’ 트럼프를 그 예외로 만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딥 사우스(Deep South·공화당 정치 텃밭인 남부의 심장부)’에 속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예비경선)에서 트럼프가 경쟁자를 10%포인트 이상 압도하며 승리한 것이 “트럼프주의의 파괴력은 엄연한 현실”임을 일깨웠다고 CNN은 보도했다.
트럼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 직전 TV토론에서 이라크전쟁을 반대하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마치 ‘진보적인 민주당원’ 같은 모습이었다. 토론장의 공화당 지지자들에겐 야유를, 반전(反戰)운동단체들엔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보다 더 진보적”이란 찬사를 들었다.
FT는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미국이 개입한 거의 모든 전쟁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곳이다. 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제대로 헛발질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경선 결과는 트럼프의 압승이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총체적인 ‘트럼프 공포’에 휩싸이게 됐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출마 선언 이후 끊임없이 “보수주의자가 맞느냐”는 질문을 받아 왔다. 그는 공화당의 이념인 ‘작은 정부론’을 지지하지도 않고, 자유무역에도 반대한다. 부자와 월스트리트에 대한 증세(增稅)도 주장해 왔다. 22일 저녁 폭스뉴스에선 “한때 민주당원이었고 진보적 성향의 뉴요커 출신인 당신의 정치 이념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하다”는 질문을 받았다. 트럼프는 “보수주의자 맞다. 강한 군사력을 지지하고, 참전용사와 전역군인에 대한 파격적 대우를 약속하며, 교육정책도 시민의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의 허핑턴포스트는 “트럼프는 국민의 관심을 끄는 방식을 잘 아는 정치인일 뿐 그의 공약엔 일관된 국정 철학이 없다”며 “나라가 어찌 되건, 달콤한 얘기만 해줄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트럼프를 뽑아라”라고 꼬집었다.
당 지도부와 보수층을 대표하는 잡지 ‘내셔널리뷰’ 등 보수진영은 “트럼프주의는 미 보수주의에 대한 큰 위협”이라며 위기감을 드러내면서도 트럼프 대세론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2위를 차지한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45)을 ‘트럼프의 대항마’로 정하고 나머지 후보들이 루비오를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려면 2위 경쟁을 벌이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46)부터 주저앉혀야 하는데 이 역시 쉽지 않다. FT는 “크루즈의 본거지인 텍사스 경선(3월 1일), 루비오의 친정인 플로리다 경선(3월 15일)에서도 트럼프가 이기면 게임은 끝난다. 현재까지 두 곳에서 트럼프가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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