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태훈]살생부 ‘찌라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일 03시 00분


황태훈 정치부 차장
황태훈 정치부 차장
이른바 ‘찌라시(정보지)’는 ‘카더라 통신’이다. 정치 경제 문화 분야 등에서 귀동냥한 정보 모음이다. 보통 증권가에서 뿌려진다. 흥미롭지만 신용도는 떨어진다. 미확인 루머가 적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찌라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다. 떠도는 소문이 진실로 확인될 때 그렇다.

요즘 여의도에서도 찌라시가 돈다. 4·13총선을 앞두고 죽이고 살릴 이를 담은 ‘살생부(殺生簿)’, 즉 ‘공천 학살’ 명단이다. 조선 단종 때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왕위 등극을 도모하며 만들었다는 살생부가 매번 총선 때만 되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셈이다. 대상은 ‘지역을 안 챙긴 부적격자’ ‘의정활동, 여론조사 하위 평가자’다. 그러나 속내는 내 편 네 편 가르기다. 권력의 눈 밖에 나면 쳐낸다는 비정한 논리다.

새누리당 내에선 공천 살생부 ‘진실게임’이 한창이다. 공천에서 탈락시킬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계 명단이 있다는 거다. 김무성 대표는 2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천 관련 문건을 받은 적도, 말을 전해 들은 바도 없다”고 살생부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전날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살생부설(說) 유포와 관련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같은 당 정두언 의원은 전날에 이어 이날 오전에도 “김 대표에게서 살생부 명단이 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후에는 “이제는 빨리 수습해 정상적으로 나아갈 때”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날 새누리당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선 김 대표와 정 의원의 해명을 듣고 앞으로 공천 관련 흑색선전 유언비어 유포에 강력 대처키로 하면서 일단 사태는 봉합됐다.

그러나 일각에선 “청와대에서 비박은 물론이고 친박 중진이 포함된 공천 배제 명단을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흘러 나왔고 청와대가 발끈하는 일도 벌어졌다. 언제든 다시 친박-비박계 간 공천 갈등이 일어날 불씨가 남아 있다.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드린다”는 김 대표의 상향식 공천이 산으로 갈 지경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살생부가 도는 건 아니지만 물갈이 본격화로 홍역을 앓긴 매한가지다. 김종인 대표는 하위 평가자 20% 컷오프에 이어 일부 다선(多選) 의원까지 쳐내려 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의 혁신안에 ‘김종인 혁신’을 덧입히는 모양새다. 문 전 대표의 친노(친노무현) 진영까지 혁신 대상이다. 문 전 대표는 경남 양산에 머물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암중모색하는 분위기다.

야당 의원들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누구든 공천 배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지난달 23일부터 국회 본회의장을 접수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도 그렇다. 명분은 정부 여당의 테러방지법이 개인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밤샘 연설에 10시간이 넘는 국내 최장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을 경신하며 테러방지법을 막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의원의 연설은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지역 지지층의 관심 얻기’로 비친다. 텅 빈 회의장에서의 연설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이유다.

살생부나 물갈이 파문으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상처가 남는다. 살아남았다고 모두 정의로운 승리로 보기도 어렵다. 권력에 줄을 잘 선 덕을 본 이들이 적지 않아서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국회의원은 어떻든 국민들보다 똑똑하다. 그들이 잘나서 의원이 됐다면 물론 그런 것이고, 그들이 못났다면 그걸 모르고 선출한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다”라고…. 결국 유권자가 똑바로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다.

황태훈 정치부 차장 beetlez@donga.com
#공천#새누리당#정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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