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일부 직원들이 “박현정 대표(54·여)가 막말을 하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며 배포한 호소문에 대해 경찰이 ‘허위사실’이라고 밝혔다.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63)의 부인 구순열 씨(68)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정황도 확인됐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1년여간 진행한 ‘서울시향 사태’ 수사 결과를 3일 발표했다. 핵심은 ‘서울시향을 지키고 싶은 직원 17명 일동’ 명의로 작성된 호소문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경찰은 호소문을 작성해 배포하는 데 가담한 정 전 감독의 비서 백모 씨(40·여) 등 서울시향 직원 10명을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불구속 기소 의견)하기로 했다. 또 백 씨를 막후에서 지시한 정황이 포착된 구 씨도 같은 혐의로 기소중지 의견으로 송치하기로 했다. 구 씨는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 호소문 작성 직원 7명은 가짜
서울시향 직원 윤모 씨(33·여)는 당시 호소문 배포 과정을 숨기기 위해 파일을 이동식저장장치(USB메모리)에 담아 지인에게 전달했다. 지인은 이를 익명이 보장되는 호주 e메일 계정을 이용하고 인터넷주소(IP주소)를 바꿔 발신하는 등 신중을 기했다. 그런데 경찰 수사 결과 호소문 작성에 참여했다는 17명 중 7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호소문에는 2014년 12월 29일 사퇴한 박 전 대표의 성추행과 막말 및 성희롱, 인사 전횡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졸지에 파렴치한 상사로 낙인찍혔다. 이어 피의자 곽모 씨(40)는 2013년 9월 26일 서울시향, 예술의전당 직원 14명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박 전 대표가 주요 부위에 접촉을 시도했다고 경찰에 고소까지 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예술의전당 직원들은 “성추행이 전혀 없었고 화기애애하게 회식이 마무리됐다”고 진술했다.
호소문에 담긴 박 전 대표의 성희롱과 막말 발언도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너는 미니스커트 입고 나가서 음반 팔면 좋겠다”, “사손(회사 손해)이 발생하면 월급에서 까겠어. 니들 월급으로 못 갚으니 장기(臟器)라도 팔아야지 뭐” 등이다. 경찰은 “일부 피의자의 일방적 주장인 데다 진술도 크게 엇갈려 허위로 판단했다”며 “박 전 대표의 평소 언행에 대해 피의자를 제외한 다수 직원은 ‘직장에서 용인될 정도’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피의자들은 박 전 대표가 인사위원회 의결 없이 특정인을 승진시키거나 지인의 자녀에게 보수를 지급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사 결과 절차상 흠이 없었고, 보수를 지급한 사실도 없었다.
○ 정 전 감독 부인, 호소문 유포 지시
경찰은 백 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삭제된 문자메시지를 복원한 끝에 2014년 10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백 씨와 구 씨가 주고받은 670여 건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경찰이 문자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박 대표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라’, ‘현대사회에선 인권 이슈가 중요하다. 인권 침해 이슈만 강조해라. 절대 잊지 마라’ 등의 내용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구 씨의 변호인은 “박 전 대표로부터 막말 등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사정을 듣고 이를 심각한 인권 문제로 파악해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도록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주고받은 문자에는 인권 유린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은 없었고, 박 전 대표 퇴진, 정 전 감독의 서울시의회 증인 출석 및 재계약 등 세 가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대화가 오간 것으로 확인됐다”고 반박했다.
○ 박 전 대표의 개혁 드라이브에 반기?
경찰은 서울시향 일부 직원들이 박 전 대표를 퇴진시킬 목적으로 호소문을 만들어 배포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배경을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먼저 박 전 대표가 취임 후 성과주의를 강조하면서 업무가 과중해지자 직원들이 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다. 삼성생명 마케팅전략그룹장, 여성리더십연구원 대표 등을 지낸 박 전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 전 감독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2013년 2월 서울시향 첫 여성 대표로 취임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평소 직원들의 일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고 엄하게 꾸짖어 직원들의 반감이 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는 정 전 감독의 불투명한 예산 사용에 문제를 제기해 그와도 갈등을 빚었다. 평소 남편의 매니저 역할을 해온 구 씨가 남편과 박 전 대표의 갈등이 깊어지자 이번 사건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2월 기자회견에서 “정 감독의 지시라고 하면 규정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예산 전용(轉用)도 예사”라며 “규정과 절차를 중시하는 나와 갈등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정 전 감독의 법률 대리인은 ‘경찰의 짜맞추기식 수사’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서울시향도 박 전 대표의 인권 침해를 인정한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박 전 대표는 “구 씨가 선의로 직원을 도와준 게 맞다면 한국에 돌아와 당당하게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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