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알파고 시대, 통일도 새로 상상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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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남쪽에서 10년 남짓 살면서 태조나 세조를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말 많이 봤다. 남한 사람들이 역사 드라마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한편으론 북한 사람들이 불쌍했다. 그들에게도 분명 역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피가 흐를 테지만, 태조나 세조를 아는 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북한에도 역사물 작품들이 없진 않지만 왕조 대신 외적이나 지배 계층과 싸운 역사와 인물만 주로 내세운다.

남쪽에서 또 놀라웠던 점은 역사물은 그렇게 많은데 미래를 상상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미국만 봐도 ‘터미네이터’ ‘아일랜드’ ‘아이로봇’ ‘마션’ 등 미래가 배경인 영화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한국은 할리우드 문화권에서 반세기 넘게 산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똑같다. 거긴 미래를 다루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우리 민족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러니 남북이 싸워도, 정치권이 싸워도 과거사를 놓고 “사과하라”는 목소리만 끈질기게 나오는 것 아닌가 싶다. 이웃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과거에 대해 “그땐 그럴 사정이고 앞으로가 중요하지” 또는 “따져봐야 지금 도움 안 된다”는 식의 실용주의적 세계관이 뚜렷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법이 거의 없이 시시비비가 붙으면 끝까지 이기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이걸 논증하느라 유교 문화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은 정의감도 중요하지만, 과거에 대한 관심의 절반만 미래를 위해 쏟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왜 우린 역사 캐보기는 그렇게 즐기면서 미래를 상상하는 데엔 인색한 것일까.

미래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우주나 좀비를 주제로 할리우드와 경쟁할 순 없겠지만 앞으로 수십 년 안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일만 한번 상상해 보라. 이 땅만큼 역동적인 사건들을 잉태한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있을까.

통일 과정만 상상해 봐도 훌륭한 시나리오가 줄줄 나올 것 같은데 불행히도 흥행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시청자들은 여전히 600년 전 태조나 세조에게 더 관심이 많을 테니까.

난 미래가 과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미래는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한 대가는 나중에 혹독한 청구서가 돼 돌아온다.

통일만 하면 대박이 되는 줄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허탈감이 느껴진다. 난 작금의 정치권에 통일대박을 기대할 바엔 로또대박을 기대하겠다. 물론 한국엔 ‘한강의 기적’을 만든 과거의 영화(榮華)가 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모두가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과연 지금도 그러한가.

통일은 우리 민족이 반세기 안에 맞닥뜨릴 최대 사변이다. 그런데 통일 이후를 예상한 분석들엔 상상력이 너무 부족하다. 대다수가 북한이 붕괴되면 당연히 남쪽 시스템을 북에 복제하면 되는 줄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과연 북한의 이상향이 될 수 있을까.

머릿속을 당리당략과 사익으로 채운 정치인들을 북한에 또 복제할 순 없다. 북한 청년들도 헬조선을 외치게 할 순 없고, 북한 아이들이 학벌을 좇아 밤 12시까지 학원을 전전하게 할 순 없다.

더구나 지금은 과거 백년의 변화가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시대다. 마침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지긴 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20∼30년 내로 정치제도와 관료제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무인차가 달리는 도로 옆에선 3차원(3D) 프린터가 집을 찍어내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런 미래에 통일이 오면 북한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우선 나부터라도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북한의 정치 경제 교육 사법 치안 등 사회제도의 청사진을 21세기에 맞는 선진시스템으로 그려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 든 생각은 북한의 잠재력이 정말 크다는 것이다.

토지도 국유이고 지정학적 위치도 뛰어나며 교육 수준도 높다. 제일 맘에 드는 것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북한의 발전을 가로막을 기득권 세력도 동시에 거의 사라질 것이란 점이다. 이런 북한에 모범적인 시스템과 리더십만 들어서면 수십 년의 발전 단계를 빠르게 건너뛸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 이후 신분제도가 완전히 무너진 빈터에서 시스템과 리더십의 힘으로 경제 기적을 만들어 낸 한국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다. 북한에서도 그런 역사가 재현되면 반세기 뒤엔 남쪽이 북한을 따라 배우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남북이 함께 흥하려면 역사 드라마에 빠져 있는 우리도 변해야 한다. 앞을 내다볼 줄 모르면 투표하고 돌아서자마자 “저 정치인에게 속았다”고 분노하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될 뿐이다. 또다시 투표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알파고#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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