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파이퍼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왔던 영화 〈업 클로즈 앤 퍼스널〉. 20년 전 영화라 가물가물하지만, 미셸 파이퍼가 엄청나게 멋졌던 것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글로벌 뉴스 채널 CNN을 통해 한반도 소식을 세계로 전했던 손지애 교수의 행보는 영화 속 미셸 파이퍼와 닮았다. 지방 방송국에서 시작해 유명 방송사 앵커가 된 그녀처럼, 손지애 역시 작은 잡지사 기자로 출발해 크고 작은 모험과 도전 끝에 꿈을 이뤘으니 말이다.
손지애(53) 교수가 최근 작가라는 새로운 명함을 갖게 됐다. 3월 초 서울 북촌의 한 한옥에서 그를 만났다. 시원스럽게 난 통창 너머로 한옥 지붕들이 고즈넉하고 정겹게 펼쳐지는 곳이었다. 안과 밖,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창처럼 1992년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외신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뉴스를 전해왔다. 그리고 최근 이에 관한 후일담을 담은 에세이 〈손지애 · CNN · 서울〉(김영사)을 펴냈다.
일생일대 오보에서 시작된 기자로서의 여정
손지애 교수는 이화여대 재학 당시, 번역, 통역 등 여러 가지 직업을 탐색하던 끝에 교내 영자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기자가 천직임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동기부여를 해준 사람이 있다. 그가 기획한 이대 동문 인터뷰 시리즈 첫 주자였던 연극배우 윤석화다. 윤석화는 그후 20여 년이 흐른 2007년, 이대 출신이 아님을 스스로 고백했으니 그의 기자로서의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생일대의 오보에서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인터뷰 제안을 하면서도 윤석화 선생님이 저 같은 풋내기 기자를 만나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인터뷰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방배동 지하 카페에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혼미한 정신으로 인터뷰를 끝냈을 땐 ‘꼭 유명한 기자가 되세요’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뭔가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 후 한참이 지나 윤 선생님이 동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대를 나왔든 그렇지 않든 그분의 재능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기자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뉴욕타임스〉 공채 시험에 합격해 화려하게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건 아니다. 아예 〈뉴욕타임스〉는 그런 식으로 기자를 채용하는 일이 드물다. 첫 시작은 월간 〈비즈니스코리아〉라는 작은 영문 잡지사의 수습 기자였다. 영문 잡지사를 선택한 이유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4년간 미국 생활을 해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에 기회가 있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가 〈비즈니스코리아〉에 입사한 198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이 지금처럼 세계화되지 않았던 시대라 영문으로 기사를 쓰는 일은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영문 뉴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해외 언론사들은 한국 소식을 영어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외신에 진출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이 쓴 기사와 이력서, 자기소개서 등을 동봉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등에 보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 1순위였던 〈뉴욕타임스〉에서 연락이 왔다. CNN으로 옮긴 과정도 흥미롭다. 1994년 한반도는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과 김일성 사망으로 그 어느 때보다 외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국 주재 기자가 없던 CNN은 〈뉴욕타임스〉 소속인 그에게 종종 생방송 연결을 부탁하다가 그해 여름 스카우트 제안을 했다. 손지애는 그동안 동경했던 CNN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30대 초반에 CNN 최초의 동양인 지국장이 됐다. 당시 스카우트 전쟁에서 진 〈뉴욕타임스〉의 표정은 어땠을까.
“조금 기분 나빠했죠. 대놓고 붙잡지는 않았지만 ‘설마 정말 CNN으로 가는 거야? 기자다운 기자가 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라며 실망하는 눈치였어요(웃음). 그들이 보기에 CNN은 좀 얄팍한 매체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두 매체를 모두 경험해본 바로는 어떤 사안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이나 임팩트는 CNN이 강하지만, 〈뉴욕타임스〉는 그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는 프레임을 제공하려고 노력해요. CNN이 불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면, 〈뉴욕타임스〉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고 할까요?”
청와대에서 모유 짜고, 시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대선 보도를 하다
손지애는 언론에 몸담은 27년 동안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을 거의 모두 누볐고,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다섯 대통령을 모두 인터뷰했다. 매일 정신없이 현장을 뛰는 기자이면서 동시에 시부모와 함께 사는 맏며느리이자 세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기도 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기에, 이에 관한 에피소드도 무궁무진하다. 24시간 생방송이 생명인 CNN에서 일하면서 아이들을 모유로 키운 게 대표적이다.
“사실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됐지만, 당시 육아서들을 살펴본 결과 아이에게 분유보다 모유가 좋다고 하니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온갖 장소, 심지어 최전방 군부대 화장실에서도 모유를 짰던 기억이 나네요. 덕분에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자랐죠. 지금 돌아보면 너무 극성스러웠나 싶기도 하지만, 꼭 모유 수유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힘든 과정을 지나면 그만큼 의미 있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청와대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유를 짰던 그녀지만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만큼은 뉴스와 개인사 사이에서 깊은 갈등에 빠졌다. 선거 전날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외며느리인 그녀는 결혼 후 줄곧 시부모와 함께 살았고, 시아버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선거 보도도, 시아버지의 장례식도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버님이 살아 계시면 뭐라고 하셨을까’란 생각을 해봤어요. 분명 중요한 취재를 외면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 같았어요. 다른 가족들도 빨리 나가보라며 제 등을 떠밀었고요. 그렇게 현장에 나가 여의도, 광화문, 시청 등을 누비며 밤새 취재하고 장례식장에 돌아와 다시 문상객을 맞았어요.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닥치면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어요. 그런 일을 많이 겪다 보니 제 나름대로 요령을 하나 터득했어요. 너무 멀리 보지 말고 당장의 일에 집중하는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일 저녁까지 이 상황을 견뎌내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성공이야’라고요.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 저녁이 되면 상황이 훨씬 수월해진 것을 발견하곤 하죠.”
그가 CNN으로 옮긴 후 세계로 타전했던 뉴스들 중에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도 있다. 라디오를 듣다가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광화문 지국을 나서 남산 3호 터널에 이르렀을 때 도로는 이미 마비 상태였다. 반대 차선으로 역주행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과 피 흘리며 쓰러진 피해자들, 구호에 나선 소방관과 경찰, 시민들 그리고 사고 현장을 뿌옇게 뒤덮었던 회색 플라스틱 가루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비극적인 현장은 현실이라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에 가까웠다. 이날의 경험은 그가 기자로 새로 태어나는 전환점이 됐다.
“휴대전화로 리포팅을 해야 하는데 주변 통화량이 너무 많아서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통화를 시도하는데 연결이 지연되니까 뒤에 있던 아저씨가 ‘빨리 전화를 끊으라’고 재촉하더니 생방송이 막 시작되는 순간 저를 끌어내려고 잡아당겼어요.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간신히 리포트는 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많이 후회했어요. 백화점 인근에 사는 그 아저씨는 아내와 아이들이 혹시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방송을 하겠다는 욕심에 주위 사람들의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거죠. 그 후로 스스로 다짐했어요.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전화를 끊고 차례를 양보할 거라고요. 그 어떤 뉴스나 방송도 사람보다 중요할 순 없으니까요.”
2010년 CNN 퇴사 후 G20정상회의 준비위원회 대변인, 청와대 해외홍보비서관, 아리랑TV 사장 등을 거친 그는 현재 모교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3월의 교정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하나같이 어깨에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있는 듯한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학생들이 너무 움츠러들어 있는 것 같아요.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야 할 나이인데, 취업에 학점에 걱정이 너무 많은 거죠. B학점을 주면 항의하기도 하고, 심하면 엄마가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학생들에게 학점에 목숨 걸지 말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나 더 하라고 말해요. 혹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하지만 막상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걸 보면 학점에 큰 비중을 두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그러니 학점에 얽매여서 대학 생활을 소극적으로 보내지 않으면 좋겠어요.”
인생의 빈 페이지를 도전과 모험으로 채우는 걸 두려워 말아야
그는 요즘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있다고 했다. 책은 학벌, 재력, 외모를 비롯해 자아실현에 대한 의지와 출세에 대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평균 혹은 그 이하의 수준으로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꿈꾸지 못하는 주인공이 이민이라는 모험을 통해 행복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젊은 세대의 불안과 우울은 전 세계적인 문제지만, 우리나라는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심각하다.
“사회적 불평등을 비롯한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교육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문제 같아요. 엄마들이 카페에 만날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이 아이 공부, 학원에 관한 것들이잖아요. 아이 입장에선 죽도록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하는 줄 알았는데 취직도 안 되고, 부모는 자신에게 올인하느라 남은 게 하나도 없고, 그러니 좌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죠.”
손지애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대안으로 세계로 눈을 돌려볼 것을 제안했다. 세계화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한 게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니,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아직 해외에는 기회와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도 국제기구나 구호단체 같은 곳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지만, 저는 더 많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쟁력도 충분해요.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 청년들처럼 똑똑한 젊은이들이 없거든요. 그럼에도 외국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글로벌 매너나 애티튜드를 가르치는 것도 필요해요. 모두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김용 세계은행 총재 같은 사람이 되진 못하더라도 ‘한국 청년들은 참 예의 바르고 성실해!’ 라는 평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겠어요.”
손지애 교수의 에세이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매듭지어졌다. 돌아보면 그에게도 이력서에 대학 영자 신문 기자 경력을 한 줄 적어놓고 나머지 많은 칸을 어떻게 메워야 할 지 몰라 한숨 쉬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의 비어 있는 페이지를 도전과 모험으로 채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가 지금의 자리에 선 비결이자, 젊은이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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