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에서 계속) 빛줄기가 흘러나온 곳은 에이전트7(임희윤 기자)의 휴대전화였다. ‘우리 세…, 세정이를 구해줘.’ 수수께끼 같은 문자메시지의 발신자는 ‘아재 팬’ 에이전트5(김윤종 기자). 서울 마포구 망원동 탐사에 나섰다 실종된 그였다. 그가 부탁한 ‘세정이’는 걸그룹 아이오아이를 거쳐 최근 구구단 멤버로 데뷔한 김세정이었다. 아, 삼촌 팬들이 ‘갓세정’으로 부르는…. 》
2016년은 한국 아이돌 그룹 20주년이다. H.O.T.(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가 1996년 데뷔했다. 젝스키스(6개의 수정)가 9월 10, 11일 16년 만의 단독공연을 연다. 에이전트7은 이런 시점에 구구단, 아이오아이, 블랙핑크, C.I.V.A처럼 듣는 이를 멍하게 만드는 작명(作名)으로 지구 아이돌 무력화를 기도하는 어두운 세력의 존재를 감지했다. 휴업 중인 에이전트7이 다시 슈트를 차려 입기로 이만큼 적절한 때는 없어 보였다.
○ “대표님, 사… 사랑합니다.”
크나큰, 소나무, 가물치, 풍뎅이, 칠학년일반…. 최근 몇 년 새 이 판에 창궐한 기이한 작명 붐은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크나큰(KNK·3월 데뷔)은 185cm로 평균 신장이 크나큰 남성 그룹이다. 소나무(2014년 데뷔)는 바르고 곧게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여성그룹. 7인조 걸그룹 칠학년일반(2014년 데뷔) 멤버들에겐 반장부터 ‘빵 셔틀’까지 학급 내 위치가 부여돼 있다. 2013년 싱글 ‘알탕’으로 데뷔한 풍뎅이는 3인조 여성그룹.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작명의 주체부터 살펴야 했다. 일반적으로 가수 이름 짓기에 가장 큰 발언권을 지닌 것은 가요기획사 대표다. H.O.T.부터 NCT까지 20년간 10여 개의 모든 그룹 작명에 직접 아이디어를 낸 SM 이수만 회장이 대표적이다. 사내 공모, 사외 공모도 흔한 절차다. 이때도 최종결정권자는 임원진이나 대표다.
남성그룹 가물치(K-MUCH·2014년 데뷔)는 크롬 엔터테인먼트(크레용팝 소속) 전 대표의 작명이다. 이 ‘대물급’ 그룹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포털 사이트에 검색했다가 급한 마음에 제일 위에 뜬 ‘보신원’ 홈페이지를 클릭할 뻔했다. 특급 미끼에 낚시 전문지 ‘월간 낚시21’도 반응했다. 2014년 3월호에 가물치 인터뷰 기사를 실은 것.
○ “튀려다 얻는 오명보다 튀어서 얻는 득이 많아….”
핑클(Fin.K.L·‘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끝낸다’는 의미를 담은 Fine Killing Liberty의 약자), 젝스키스 때는 뭔가 멋져 보이려는 몸부림이라도 보였건만…. 일견 일차원적이고 무성의해 보이는 이름의 범람은 2014년부터 시작됐다. 아이돌 과당경쟁 체제 때문이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아이돌 연감 2015’에 따르면 작년에만 60팀(324명)의 아이돌 그룹이 데뷔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를 만났다.
“이름이 우습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리스크보다 수많은 그룹 중에서 이름으로라도 튈 때 나타나는 효용성이 더 높다는 게 기획사들의 계산일 겁니다. ‘헛발질’들은 그러다 나오는 거죠.”
9인조 여성그룹 구구단을 데뷔시킨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성시경 박효신 서인국 빅스를 보유한 이 번듯한 회사가 도박 같은 작명을 한 이유는 뭘까.
“신중했습니다. ‘튀어봐야지’란 의도는 없었어요. ‘아홉 매력을 지닌 아홉 소녀가 모인 극단’이란 콘셉트를 잘 표현할 이름이죠.”(김숙경 젤리피쉬 홍보이사)
사내 공모를 거쳐 뽑힌 세 가지 작명 안(‘두근두근’ 등) 가운데 구구단을 누구보다 지지한 것은 황세준 젤리피쉬 대표였다. 특이한 사례도 있다. 댄스가수 NS윤지의 이름은 도올 김용옥의 솜씨. 그가 지어준 예명 ‘새혼(New Spirit)’에서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조사가 거듭될수록 눈에 띈 것은 한국어 이름이 영어 이름에 비해 턱없이 박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었다. 가요기획사 임원진의 각별한 한국어 사랑 역시 눈물겨웠다. 아이돌 그룹 이름에는 왜 영어가 대체로 잘 어울릴까. 두툼한 신경언어학 서적을 펼치며 언어학의 세계적 석학에게 막 국제전화를 걸려던 찰나…. 복도 끝에서 요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휴업 중인 요원은 어떤 사안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조직 지침서 귀퉁이에 적힌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아뿔싸.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들어간 책상 밑에서 뭔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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