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저녁 발생했다가 불과 6시간 만에 불발로 끝난 터키 쿠데타는 ‘21세기 터키’를 구축해온 쌍두마차의 갈등과 분열을 전면에 노출했다.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62)과 21세기 이슬람사상가 중 영향력이 가장 큰 현실주의 이론가 펫훌라흐 귈렌(75)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6일 TV 연설에서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1999년부터 미국에 체류 중인 귈렌을 지목하며 미국 정부에 테러범인 그의 인도를 요구했다. 귈렌은 이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세일러스버그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를 전면 부인하며 “이번 쿠데타는 에르도안 정부가 연출한 쿠데타일 가능성이 크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은 2013년 결별 전까지 21세기 터키의 비전을 공유한 ‘어제의 동지’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길거리 좌판 행상을 하며 학교를 졸업한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터키 민중의 세속주의적 욕망과 종교적·민족적인 자긍심 사이에서 놀라운 줄타기를 해왔다. 1994∼1998년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 시장을 지낸 그는 2001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하며 전국적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AKP는 이슬람의 종교적 전통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서구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접목시키겠다는 비전을 내걸었다.
그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이 귈렌이다. 터키의 명문 이슬람학자 가문 출신의 귈렌은 이슬람 합리주의 전통에 선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다. 2008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선정한 ‘세계 최고 100대 지성’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그는 이슬람의 전통에서 자유와 민주라는 서구적 가치를 끌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며 교황청, 유대교 지도자와도 대화에 나섰다. 터키어로 봉사를 뜻하는 ‘히즈메트(Hizmet)’운동을 통해 이슬람의 현대적 가치를 전파해왔다. 터키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180개 지부에 100만∼800만 명의 추종자를 거느린 히즈메트운동은 이들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 학교와 싱크탱크, 언론사를 운영하며 귈렌의 사상에 감화된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이런 귈렌의 지지라는 날개를 단 에르도안은 2003년 총선 승리를 시작으로 세 차례나 총리를 연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취임 당시 3030억 달러였던 터키의 국내총생산(GDP)을 2012년 8172억 달러로 늘렸고 유럽연합(EU) 가입 협상도 시작했다. 그로 인해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케말 파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게 되자 에르도안은 터키 헌법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뒤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현실의 권력가 에르도안과 재야의 사상가 귈렌 사이 균열도 시작됐다.
그해 12월 터키 검찰은 부동산 비리 혐의로 에르도안 내각의 장관 3명을 포함한 그의 최측근 24명을 구속하며 에르도안을 압박하고 나섰다. 에르도안은 이를 귈레니스트(귈렌 추종세력)의 쿠데타로 간주하고 공권력을 총동원해 군부와 경찰, 언론사 내부에서 대대적인 ‘귈레니스트 솎아내기’에 착수했다. 급기야 올해 1월부터는 귈렌을 국가전복 혐의로 기소해 궐석재판까지 진행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쿠데타가 무산되자 에르도안은 바로 잠재적 최대 정적인 귈렌 사냥에 나선 것이다. 귈렌은 “1990년대 군부 쿠데타로 탄압받고 감옥에까지 갇혔던 사람이 어떻게 쿠데타를 지지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터키의 민주주의는 쿠데타를 통해 뒤바꿀 수 없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터키 군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노선 갈등으로 갈라선 에르도안과 귈렌의 대결에서 ‘이슬람 민주주의’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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