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재야 일러스트 고수를 찾아라! ② 이승섭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0일 19시 11분


펜으로 ‘리얼리즘’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가
“그림은 취미이자 사람과 소통하는 매개체”

군 복무 중 그린 펜화 ‘코끼리’와 ‘바다거북이’. 이승섭 씨는 이 작품을 계기로 펜화를 시작했다.
군 복무 중 그린 펜화 ‘코끼리’와 ‘바다거북이’. 이승섭 씨는 이 작품을 계기로 펜화를 시작했다.
그림보다는 낙서를 좋아하는 작가 이승섭(23) 씨.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을 준비하면서 지긋지긋하게 그린, 그저 그런 그림보다 차라리 낙서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시간엔 문제 풀이 대신 ‘낙서 삼매경’에 빠졌다. 대학 미술 전공학과의 경우 대부분 수학시험을 안 보니 별 문제될 게 없었다.

사실 대학 진학에도 큰 욕심이 없었다. 대신 조금 독특한 목표가 하나 있었다. 대학에 간다면 좋은 대학이 아니라 충남 천안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것. 천안에서 태어난 이씨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10살 무렵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천안을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못한 게 학창시절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 그런 목표를 품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실제 자신의 바람대로 천안에 있는 상명대 천안캠퍼스 시각디자인학과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씨가 함께 어울리고 싶었던 어렸을 적 친구 대부분 천안을 떠나 다른 지역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잘못 선택을 한 것 같다. 하하하. 그래도 후회는 없다. 과 선배도 좋고, 동기들도 좋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서울에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출력을 하려고 해도 충무로로 와야 하고, SNS 공간에서 만난 친구들 모임도 대부분 서울에서 이뤄져 잘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 빼놓고는 특별히 후회하거나 아쉬워한 적은 없다.”


해병대에선 ‘그림병사’ ‘캐리커처 병사’

이씨는 유치원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표현력이 남달랐다. 가정환경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탓에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온 이면지에 그림을 그렸다. 이면지 한 상자를 금방 다 써버렸다.

“그때는 주로 만화를 그렸다. 우연히 드래곤볼 만화책을 봤는데, 그걸 그대로 따라 그렸다. 그게 드로잉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번은 친척 형이 사람 옆모습을 그린 것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한동안 사람 옆모습만 그린 적이 있다. 덕분에 지금도 사람 앞모습보다 옆모습을 쉽게 그린다.”

-대학 전공이 시각디자인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펜화 ‘곰’ ‘침팬지’ 등 주로 동물을 실물처럼 묘사한 그림이 많다.
펜화 ‘곰’ ‘침팬지’ 등 주로 동물을 실물처럼 묘사한 그림이 많다.
“어렸을 때는 꿈이 화가였다. 그런데 점점 디자이너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디자이너 겸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이다. 그래서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는 시각디자인을 선택했다.”

-대학에서는 주로 어떤 그림을 그렸나?

“원래 봉사활동을 좋아한다. 대학에 와서 좀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해보고 싶어 대기업 대학생 자원봉사단체에서 들어갔다. 거기에서 처음 벽화작업을 접했다. 초등학교와 어린이 복지시설에도 그려주고, 천안 남산중앙시장 벽화도 일부 그렸다. 그걸 계기로 군에 입대해서도 벽화작업을 해 포상휴가를 받기도 했다. 해병대 1사단에서 복무했는데 부대 담장을 후임 병사와 단 둘이, 아니 거의 혼자하다시피 다 그렸다. 군에서는 그림병사, 캐리커처 병사로 불렸다.”
작가명 ‘리얼리즘’…“다 그리면 쾌감!”
군 제대 후 공장에서 일할 때 사포에 그린 그림 ‘자유의 여신상’ ‘이순신상’ ‘상어’ ‘얼룩말’.
군 제대 후 공장에서 일할 때 사포에 그린 그림 ‘자유의 여신상’ ‘이순신상’ ‘상어’ ‘얼룩말’.

-펜으로 그린 그림이 독특한데, 그건 언제부터?

“군 벽화작업 자료를 찾다가 틈날 때 개인적으로 그리고 싶은 소재를 찾던 중 코끼리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군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모나미 펜’이다. 그걸로 코끼리 그림을 그려서 인터넷에 올렸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그게 펜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구할 수 있는 펜으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게 무척 매력적이다.”

-펜화를 그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코끼리 사진을 그리는 데 8시간이나 걸렸다. 한 번 그리면 지우지 못한다. 빛 부분만 남기고 그려야 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면 안 된다. 실수하면 티 안 나게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엄청 신중하게 그린다. 사실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가장 오래 걸린 그림은?

“일주일 정도 걸린 적이 있다. 배경이 온통 까맣고 별이 박혀있는 ‘별빛이 내린다’는 작품인데, 볼펜으로 배경을 칠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림 소재는 어떻게 구하나?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할 때 벽 먼지를 닦아서 그린 미국 배우 ‘톰 크루즈’.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할 때 벽 먼지를 닦아서 그린 미국 배우 ‘톰 크루즈’.

펜화 ‘별빛이 내린다’. 여자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느낀 분위기를 표현한 그림.
펜화 ‘별빛이 내린다’. 여자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느낀 분위기를 표현한 그림.

“펜화는 주로 사진을 보고 그린다. 개인적으로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 작가명도 ‘리얼리즘’이다. 그림을 다 그렸을 때 쾌감을 느낀다. 왠지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이랄까. 반면 수채화는 주로 경험이나 생각을 담는다.”

-사포에 그린 그림도 있던데.

“군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포로 TV프레임을 닦았다. 일하면서 사포에 흰색 알루미늄 가루가 묻는 걸 보고 그림을 그려서 인터넷에 올렸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2개월 정도 일하는 동안 주로 사포 그림을 그렸다. 힘든 내 자신을 그 속에 담고 싶었다.”

“그림 그릴 곳은 어디에나 있다”

-그림은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난 술이랑 담배를 안 한다. 친구들이 항상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본다. 그럴 때면 그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재미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안 심심하다. 좋은 취미다. 그림을 안 그리면 우울해진다. 또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인 것 같다. 그림을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의지만 있다면 그림을 그릴 곳은 어느 곳에나 있다’고. 결국 의지의 문제다.”
수채화 ‘반쪽’. 비 오는 날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에 반쪽만 젖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린 것.
수채화 ‘반쪽’. 비 오는 날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에 반쪽만 젖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린 것.

수채화 ‘노인과 바다’. 동화작가를 꿈꾸며 그린 그림.
수채화 ‘노인과 바다’. 동화작가를 꿈꾸며 그린 그림.

-앞으로 계획은?

“학기 중에는 과제 때문에 바빠서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우울하고 힘들었다. 이번 가을학기 마치고 내년에는 휴학을 할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서울 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 출전할 계획이다. 올해는 부스 비용 부담 때문에 다른 작가 2명과 같이 나갔는데, 내년에는 단독으로 나가고 싶다. 최종적으로 동화작가가 꿈이다. 따뜻한 감성을 담은 동화책을 내고 싶다.”

방학 때마다 막노동을 해서 스스로 학비를 번다는 이씨. 90세가 넘은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어머니는 마트에서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마냥 공부만 할 수 없어서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충남 태안에서 땀을 흘린다. 낙서를 좋아하고, 조금은 엉뚱하고 순수한 미술학도 이씨의 그림에선 따뜻함이 흐른다.
이승섭 작가
이승섭 작가

◆ 이승섭 작가는?
출신 : 충남 천안
학력 : 강원고 졸업, 상명대 시각디자인학과 3학년 재학
경력 : 서울 일러스트레이션페어 2016 출전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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