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명성황후, 되살아나다?

  • 동아닷컴
  • 입력 2016년 8월 12일 10시 44분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15)

B그룹 창업자 J회장은 중년 때까지는 돈 버는 일에 영혼까지 바치다시피 했다. 재운(財運)이 좋은지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부(富)를 축적했다. 60대 초반부터는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사라지면서 쓰는 일이 더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돈을 우째 쓰모(쓰면) 좋겄노?”

J회장이 지인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별 고민을 다 하신다’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다가 제각각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하고 똑똑한 청년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해 주십시오.”

“문화재단을 설립해 예술분야를 융성하는 데 앞장서시면 어떨까요?”

“재단 만들면 골치 아픈 일도 많이 생깁니다. KAIST에 미래학과 뇌공학을 연구하도록 수백 억 재산을 쾌척한 정문술 회장님처럼 연구중심 대학에 기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J회장의 발언이 소문나자 언론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몇몇 명문대학교의 총장이 만나자고 손을 내밀었다. 총장 공관에서 융숭한 대접을 하더니 자기 학교에 발전기금을 지원해달란다.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며 접근해오는 대학도 수두룩했다. 큼직한 박사모자를 씌워주고 화려한 박사가운을 입혀주는 대신에 발전기금을 기부하라고 손을 벌릴 것이 뻔했다.


이런 제안들이 내키지 않았다. 오죽하면 컨설팅회사에 ‘돈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보람 있게 쓸까?’라는 주제로 일을 맡기기까지 했을까. 컨설팅 보고서에는 문화융성, 남북평화, 청년실업대책, 과학기술 개발 등 4대 부문에 사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담았다. 신통찮았다.


“대포 한 잔 마시며 회포나 푸세!”

J회장은 호형호제(呼兄呼弟) 관계인 재력가 O회장에게 연락했다. O회장은 J회장이 부산에서 극장 ‘간판쟁이’로 일할 때의 ‘껌팔이’ 소년이었다.

“헹님, 우짠 일입니꺼? 먼저 연락을 다 주시고….”

빈대떡집에서 만난 O회장은 J회장에게 실눈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자네한테 물어보는 기(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산더미 같은 재산을 우찌 할용(활용)하모 보람 있겄노?”

“헹님도 지(저)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네예. 하하하! 우선 막걸리로 목을 좀 축이고 나서 같이 궁리해 보입시더.”


O회장의 뇌리 속엔 삭풍(朔風) 속을 헤매던 추억의 여러 장면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1960년대만 해도 영화관에서 가끔 ‘쇼’ 공연을 했다. 남진, 라훈아, 문주란, 정훈희, 남일해 등 유명 가수가 무대에 나와 팬들을 끌어모았다. 구봉서, 서영춘, 곽규석, 이주일 등 코미디언의 웃음 연기를 보며 관객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지방에서는 이런 쇼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스타를 보려고 몰려든 관객으로 극장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소녀가수 하춘화는 코흘리개 때부터 무대에 나서 어른 팬의 심금을 울렸다.


짧은 코미디 연극에 출연할 소년 배우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갔다. 쇼 단장 A씨는 대역 배우를 구하려 속을 태우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껌팔이 소년 O군과 눈이 마주치자 반색했다. O군에게 연기 연습을 시켜보자 즉석에서 멋지게 소화했다. 서둘러 목욕, 분장을 마친 다음 무대에 세웠더니 O군은 천부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O군은 그 길로 쇼단을 따라 상경했다.


O군은 아역배우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기 시작했고 청년 시절엔 로맨스 영화의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유랑극단 출신인 쇼 단장 A씨가 영화제작업에 뛰어들어 O씨를 주연 배우로 캐스팅한 것이다.

A씨는 전국 주요 도시의 영화관 업주들에게 선금을 받고 영화를 제작해 리스크를 줄였다. 추석, 설 명절을 노린 몇몇 사극(史劇)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A씨는 돈방석에 앉았다. A씨는 연예 흥행업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어느 날 시커먼 선글라스를 쓴 사내 서너 명이 A사장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권력기관의 실무자들이었다. 그런 기관의 ‘똥 푸는 인부’도 목에 힘을 주는 시절이었다.

“배우 A, M, O, 가수 R, E… 오늘 저녁 6시에 대기시켜 주시오.”

그들은 연예인 채홍사였다. A사장은 그렇게 권력자들의 파티에 연예인을 공급하는 뚜쟁이 사업에 끌려들어갔다. 여성 연예인을 섭외하는 실무를 배우 O씨에게 맡겼다. O씨는 A사장을 ‘아부지’라고 부르며 충직하게 일을 처리했다.


처음엔 뚜쟁이 사업에 거부감이 컸던 A사장은 차츰 권력자들과 안면을 익히면서 그들에게 이권 청탁을 하면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는 맛을 누리게 되었다.

A사장은 호텔, 운수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고 여기에도 O씨의 역할이 커졌다. O씨는 영화배우로서는 일찍 은퇴하고 사업가로 데뷔한 셈이다. O씨는 A사장 집에서 한 가족처럼 살았는데 A사장의 딸도 O씨를 친오빠처럼 살갑게 대했다.


그 딸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O씨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아버지에게도 용감하게 O씨와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A사장은 딸에게 노발대발했다.

“친오빠 같은 사람과 무슨 결혼이냐?”

이유는 그렇게 댔지만 근본이 불투명하고, 가방끈이 짧고, 뚜쟁이 업자인 청년을 사위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A사장은 사법고시 차석 합격자인 청년 검사를 사위로 맞았고 훗날 그 검사는 장인의 후원 덕분에 검찰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 승진한 후 전국구 국회의원도 지냈다.

O사장은 A회장의 사업을 거의 물려받아 규모를 키우고 업종을 카지노, 나이트클럽, 주류유통업, 건설업 등으로 다각화했다. 업종 성격상 ‘주먹’의 힘이 필요했다. ‘주류유통업’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룸살롱 영업이었다.

보디가드로 채용한 프로복서 출신 P씨가 주먹들을 관리하는 데 재능을 보였다. 체구가 별로 크지 않은 P씨는 한라장사급 체형의 ‘어깨’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온몸을 던져 O사장을 보좌했다. P씨는 O사장을 ‘아부지’, A회장을 ‘할아부지’라 불렀다.


P씨는 룸살롱업계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프랜차이즈 비슷하게 운영하는 수십 개 룸살롱의 아가씨-새끼 마담-마담-사장 등의 위계(位階)에서 철저히 상생(相生)을 추구했다. 아가씨가 손님에게서 받은 팁은 전액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 새끼 마담이 일부 몫을 떼 가는 관행을 타파해 아가씨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새끼 마담이나 마담은 자신이 유치한 손님이 올린 매출액의 15%를 받으니 아가씨 손에 든 팁에 눈독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접대문화의 고급화’를 내세우며 아가씨들이 교양 수련에 몰두하도록 했다. 대낮에 미용실에서 빈둥거리는 시간을 줄여 영어, 일본어 회화 학원에 다니도록 하고 신문, 잡지, 시집(詩集), 소설을 읽도록 했다. ‘명문 여대생들이 알바로 뛰는 곳’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고급 룸살롱 행세를 했고 양주도 발렌타인 30년산 이상 프리미엄급 위주로 취급했다. 술값을 비싸게 청구해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어차피 로비 목적으로 접대하는 마당에 바가지 술값인들 무슨 상관이랴.

마담이나 여사장에게는 유수한 대학에서 개설한 최고경영자 과정(AMP)에 다니도록 등록금 전액을 대주었다. 그들은 명함에 ‘**물산 대표’ 등의 직함을 달고 경영학을 배우며 기업인들을 사귀었다. 6개월 수업 기간에 입학동기생 모임인 원우회 여성 총무직을 맡도록 하고 졸업 후에는 총동창회 여성 총무직에 도전했다.


P씨의 수제자 노릇을 한 U마담도 룸살롱 역사의 한 장(章)을 장식할 만한 인물이다. 강원도 산골짜기 탄광마을 출신인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구로동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손톱 크기만한 여중 졸업 앨범 흑백사진에서도 수려한 용모가 단연 눈에 띌 정도인 그녀는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기구한 수난을 당한다. 봉제공장 사장이 미싱 일 대신에 경리업무를 맡겼는데 회사에 사장 내복을 갖다 주러 온 부인이 U양을 보자마자 입에 거품을 물고 남편을 다그쳤다.

“저 계집아이, 화냥기가 철철 흘러넘쳐 큰일 내겠으니 당장 짤라요!”


U양은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 이웃 공장에 들어갔다. 월급으로 쪽방 월세를 내고 이것저것 생 필품을 사고 나면 남는 돈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S대 사회학과를 다니다 위장취업한 대학생 언니로부터 ‘노동법 해설’이란 책으로 세상 공부를 배웠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그 언니는 U양의 손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너도 어리지만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벽돌 하나를 쌓을래?”

“하나가 뭐예요? 한 열 개쯤 쌓아야죠.”

“용기가 가상하네! 그러나 한 사람이 벽돌 열 개를 쌓도록 파쇼 정권이 호락호락 허용하지 않을 거야.”

“파쇼 정권이 뭐예요?”

“음… 군사 독재정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면 노동자 농민 세상이 오는 거예요?”

“그렇지.”


여공 하나가 과로사하면서 사인(死因) 규명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였다. 농성 현장을 촬영한 영상이 TV에 보도됐다. 공교롭게 U양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는데 당시에 인기를 끌던 톱탤런트 C양과 빼다 박은 듯 닮았다. 신입 ‘시다’급 여공인 U양은 농성장 앞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반(反)체제 사범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마침 판사가 의식깨나 있는 법조인이어서 검찰, 경찰 조서를 면밀히 살피고 U양의 진술을 듣고는 당시로서는 ‘소신 판결’인 무죄 선고를 내렸다. 석방된 U양의 활짝 웃는 얼굴 사진이 신문에 큼직하게 나와 U양은 또 본의 아니게 유명인사가 됐다.


권력자에게 ‘기쁨조’ 여성을 공급하는 P씨는 채홍사 요원에게서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신문에 난 U양을 찾아 대령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관원이라지만 너무 무리한 처사 아닌가. 여공까지 웃음 요원으로 차출하라니.

“연예인도 앙이고(아니고)… 나무(남의) 회사 직공을 우찌 데려옵니꺼?”

그 요원은 P씨를 째려보더니 그럼 알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나갔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보니 요원들이 U양을 강제로 끌고 간 모양이다.


영문도 모르고 시커먼 지프차에 눈을 가린 채 끌려간 U양은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어디 안가에 도착하자 깡마른 40대 여성 요원 서너 명이 몰려와 U양의 목욕, 화장, 옷 입히기를 도와주었다. 여성 요원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난생 처음 봤네.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하겠다!”

어깨가 드러나는 분홍색 연회복 차림으로 선 U양의 자태에서는 뭇 사내를 무더기로 끌어들이는 자력(磁力)을 발산하는 듯했다.


“음….”

U양을 본 권력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동안 침묵했다. U양은 숨을 죽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몇 살인가?”

몸피가 두툼한 권력자는 와인을 찔끔찔끔 마시며 물었다.

“열여섯입니다.”

“음… 아직 미성년자로구만. 그럼 학교 다닐 나이… 자, 공장으로 가지 말고 이 돈으로 공부를 더 해라.”

U양은 얼떨결에 돈봉투를 받아들고 나왔다. 슬쩍 열어보니 공원 연봉의 2년치 거액이 수표로 들어있었다. U양은 야릇한 승리감, 쾌감이 느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가를 떠나 지프차로 시가지로 들어오자 채홍사 요원이 U양에게 물었다.

“연예인 되고 싶나?”

U양은 뜻밖의 질문을 받고 곰곰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은 U양을 연예계 뚜쟁이 P사장에게 소개했다. P씨는 U양이 여느 여성 연예인보다 빼어난 용모여서 보자마자 대어(大魚)라고 판단했다. 섣불리 데뷔시키기보다는 연기력, 교양을 더 쌓은 뒤에 선을 보이겠다고 작정했다. U양도 P씨와 함께 O사장 집에 기거했다.


1년 쯤 후 채홍사 요원이 P씨를 급히 찾았다.

“우리 영감님이 그 아이를 오늘 저녁에 잠시 데려오라고 하오.”

“가아(그애)는 하류계(화류계)에 안 들어가도 개안타멘서요(괜찮다면서요)?”

“국익이 걸린 중대한 일이 생겨서 그렇소.”

“국익? 그라모(그러면) 가아가 잔다르크라도 대라(돼라), 그 말이요?”

“말하자면 그렇소.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U양이 안가의 밀실에 들어가자 머리통이 애호박처럼 길쭉한 일본인 중늙은이가 유카다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U양은 지난 1년간 일본어를 익혔기에 의사소통엔 별 문제가 없었다.

“헉!”

‘애호박’ 중늙은이는 U양과 눈이 마주치자 울대가 잠시 멈칫했다. 여신(女神)급 미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겨우 숨을 고르고 말문을 열었다.


“학생이오?”

“학교엔 다니지 않습니다만…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내가 뭐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U양은 그를 살피며 ‘한국의 국익’을 연상했다. 정치인? 기업인? 체육인? 관료?

이런 유형의 직업인을 뭉뚱그린 인물로 보였다.

“수상급 거물 브로커?”

“내가 브로커로 보인다? 하하하!”

그는 홍소(哄笑)를 터뜨리더니 U양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딱 맞혔소! 일본의 최고 관상쟁이도 못 맞춘 것을! 신통하네!”

“어림짐작으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내가 무슨 일로 한국에 왔는지 맞춰 보시오.”

U양은 골똘히 생각하다 독도 관련 사안이 아닌가 해서 입을 열었다.

“독도 문제를 논의하는 밀사(密使)로….”

“음….”


애호박은 신(神)내림 받은 무당을 대하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위를 슬슬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복채를 드리겠소. 사실은… 화대(花代)로 준비한 것인데….”

노인이 봉투를 건네자 U양은 ‘화대’라는 말에 마음속으로는 발끈했으나 곧 평정심을 찾고 대꾸했다.

“잔다르크는 화대 따위를 받지 않사옵니다.”

“구국(救國) 소녀 잔다르크? 하하하! 대단하오! 그럼 뭘 받고 싶으시오?”
“조금 통 크게 대답하겠습니다. 대마도(對馬島)를 주십시오!”

“쓰, 쓰시마를?”


애호박은 밀실을 떠나는 U양의 뒷모습에서 어른거리는 환영(幻影) 비슷한 형상을 보고 현기증

이 났다. 명성황후?

노인의 증조부는 1895년 명성황후를 칼로 베어 시해하고 시신을 불 태운 낭인(浪人) 무리 가운데 하나였다.

환생한 명성황후가 바로 저 여성? 그런 짐작이 들자 노인은 온몸이 감전된 듯 전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는 오줌을 지린 줄도 모르고 방바닥에 한참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 얼마 후 일본 협객계(俠客界)에는 ‘조선 명성황후가 환생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한국의 신문사 소속 동경특파원 몇몇이 이를 듣고 취재에 나섰으나 아무도 최초 발설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U양은 그 후 신내림 받은 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기저기에 불려다니며 억지 역술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럭저럭 나이가 2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연예계엔 데뷔하지 못했고 P사장을 도와 룸살롱업계의 큰손으로 활동한 것이다. 웃음을 파는 ‘물장사’라지만 U마담은 웃음 대신 손님들에게 고급정보와 힐링을 제공했다.

U마담과 그녀 휘하의 아가씨들은 군사 독재시절을 끝내는 민주화에 일조하기도 했다. 권부(權府)에 몸담은 손님들을 만나면 민심을 전달했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독재정치를 계속 하다가는 민중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거예요. 지금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활화산처럼 터지는 날에는 탱크로도 막을 수 없을 거예요.”


무르익은 몸매와 고혹적인 눈매를 가진 U마담을 보면 대부분의 남자손님은 숨이 턱 막혀 입을 헉하고 벌린다.

어느 시인 겸 광고 카피라이터는 취기 어린 김에 U마담에 대해 ‘클리쉐’ 투성이의 싸구려 즉흥시를 읊었다. 허리띠를 풀어 자기 몸을 철썩철썩 때리며….


강렬한 색기(色氣)는 예술보다 진하고

끈끈한 음기(淫氣)는 신앙보다 경건하네

그대 정염(情炎)의 화신(化身)이여,

요염(妖艶)의 여신(女神)이여,

농염(濃艶)의 여제(女帝)여!

제우스의 정부(情婦)여!

나를 노예로 부려주소서!

내 몸뚱아리에 가장 가혹한 채찍질을 해주소서!

철썩,

철썩,

철썩!


동석한 손님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그 시를 따라 읊었다.

자칭타칭 뭇 ‘카사노바’들이 U마담을 공략하러 몰려들었으나 막상 그녀 앞에 서면 그녀의 아름다움과 카리스마에 압도당해 남성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녀는 화류계에서는 매우 드물게 처녀성을 잃지 않은 성녀(聖女)라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O회장에게서 U마담 이야기를 전해들은 J회장은 U마담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우님, 자리 한번 맨들어(만들어) 보소. 그 여성도 재산을 마이(많이) 모았을 거 아잉가? 돈을 우찌 쓰는지 이약(이야기)을 들을 갬(겸)해서….”

“헹님, 늘그막에 그 여자에게 맘 뺏기모 난감해집니데이!”

“예끼! 이 사람아! 사나(사내) 구실 못한 지가 오래 된 몸이라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카이! 하하하!”


충북 단양의 부초미술관 접견실에 나타난 U마담은 과연 첫눈에 상대방의 영혼을 빼앗을 만큼 ‘강렬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게 원숙미(圓熟美)까지 풍겼다. J회장은 까닭 모르게 목이 말라 자꾸 물을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U여사님, 지가(제가) 문화재를 모다(모아) 놓고 보이(보니) 한국적 미(美)에 대해 눈이 쪼금 떴습니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여사님은 단연 국보(國寶)입니더!”

“회장님,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고미술품 거래업자 사이에서 ‘신녀(神女)’라는 큰손 구매자가 자주 언급되던데… 혹시 여사님이 당사자 아입니꺼?”

U마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혹시 ‘간판쟁이’라는 큰손은 회장님?”

“철저히 비밀에 부쳤는데 대번에 알아보시네예! 가연(과연) 신통력이 대단하십니더! 하하하!”

U마담은 고미술품을 재력가들에게 팔아 적잖은 재산을 축적했다고 한다. 돈을 모으는 한편 쓰는 일에도 부지런히 나섰단다.

“가끔 신문에 보도되는 익명의 산타클로스, 이런 기사 보셨지요? 구세군 자선냄비에 거액을 넣은 미담(美談)도… 제가 보낸 돈이에요. 저는 모든 기부를 익명으로 한답니다. 불치병 환자의 가련한 사연을 들으면 치료비를 보내주고, 훈련비가 모자라 고생하는 운동선수에게도 금일봉을 전한답니다. 환경운동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 명의로 기부하고요.”


U마담을 데리고 온 연예계 대부 O회장도 자신의 ‘돈 사용처’를 털어놓았다.

“젊었을 때 딴따라 배우로 인기를 끌었지만 막상 겔혼(결혼)할라카이 신랑감으론 인기가 없데예. 날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아가씨가 검사 청년하고 겔혼하는 거 보이(보니) 눈깔이 훽 돌아가데예.”
O회장은 돈으로 권력을 사는 방법을 썼다. 정치권, 법조계에 로비를 펼쳐 사업을 확장했고 그 사업을 번창시키려 로비를 더욱 활발하게 벌였다. 정치헌금을 내면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주던 시절엔 O회장의 심복 서너 명에게 이런 루트로 금배지를 달아주었다.

O회장과 U마담이 떠난 후 J회장은 마땅한 재산 용처(用處)를 찾지 못해 허탈감마저 들었다. 잡념이 들지 않도록 TV를 켜 뉴스를 시청했다. 섬뜩한 뉴스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때려죽이고, 길거리 행인을 흉기로 찔러 죽이는 ‘묻지마 살인’…. 북한의 미사일 발사!


그러다 J회장의 머릿속에 어떤 발상(發想)이 섬광처럼 스쳤다. 북한 지도자에게 거액의 용돈을 제공하여 한반도 평화를 도모하면 어떨까? 개인 영달을 도모하는 수준의 북한 지도자에겐 그런 방법으로 접근해야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까? 호화롭게, 떵떵거리며 살도록 보장해주고 총칼을 내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햇볕 전략….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면 국내외 여론, 강대국 입김 등 얼마나 많은 걸림돌이 나타나겠는가. 민간 차원에서, 쉽게 말해 J회장 개인 차원에서 은밀히 추진한다면?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명성황후#고승철#소설#시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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