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 첫 정기국회가 첫날부터 파행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어제 개회사에서 “민정수석이 그 직을 유지한 채 검찰수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를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한 정부의 태도는 우리 주도의 북핵 대응 측면에서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자 새누리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퇴장한 뒤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의사일정을 보이콧한 새누리당도 잘한 것은 없지만 ‘첫째도 중립, 둘째도 중립’이어야 할 의장이 개회사부터 야권의 주장을 확성기에 대고 외친 듯한 일은 전례가 없다.
정 의장은 개회사에 앞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대야소(與大野小)일 때 여당이 일방통행 할 수 없듯이, 여소야대일 때도 야당의 일방통행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2000년 도입 이후 처음 야당 단독으로 열린 데 대한 쓴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 의장이 야당에서 당론으로 채택했거나 채택할 사드 재고(再考)와 공수처 설치를 주장하는 순간, ‘야당의 일방통행’을 막을 심판으로서의 자격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국회법에서 의장이 ‘국회를 대표’하며, 당적 보유를 금지하는 것은 철저한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20대 국회는 정기국회를 열기도 전에 “닥치세요” “멍텅구리” 같은 막말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여야의 극한 대결을 불러올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서별관회의) 청문회와 우병우 수석 문제를 다룰 운영위원회 등 ‘시한폭탄’도 산재해 있다. 친박(친박근혜)과 친문(친문재인)이 장악한 여당과 제1야당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기싸움을 벌이느라 ‘노루발못뽑이’(속칭 빠루)까지 등장했던 18대 국회 못지않은 ‘동물국회’가 벌어질 수도 있다.
개원한 지 석 달이 넘었지만 발의된 법안 1795건 중 통과는커녕 심의된 법안조차 한 건도 없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역대 최저 법안 가결률(41.6%)을 기록했던 19대 국회 같은 ‘식물국회’가 재연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벌써부터 20대 국회가 식물국회에 동물국회까지 결합된 ‘동·식물 국회’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가장 큰 책임이 국회의장에게 있다. 국회 파행 때문에 여야가 가까스로 합의한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다시 무산됐다. 여야의 선수 대결도 모자라 심판까지 나서 민생에 재를 뿌려서야 되겠는가. 정 의장은 국회 파행에 대해 사과하고, 새누리당도 한발 물러나 하루빨리 정기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 정 의장이 시간을 끌다간 아직도 ‘대권 욕심을 못 버렸다’는 소리도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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