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벌였던 물밑 외교전에서 중국이 판정승을 거뒀다. 중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남중국해 핫라인 설치를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중국에 불리한 헤이그 국제 중재재판소의 중재 내용 또한 성명서에서 빼는 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7일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과 아세안은 남중국해 해상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외교 당국 간에 대처 방안을 서로 협의하는 핫라인을 개설하기로 했다. 특히 각국 해군 군함이 해상 돌발 사태에 대처하는 등의 ‘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행동 강령(CUES)’에도 합의하고 올해 중 법적 구속력 있는 강령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 같은 합의는 이날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국-아세안 정상회의’가 끝난 후 발표됐다. 6∼8일 일정의 아세안 정상회의는 국제 중재재판소가 7월 12일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린 뒤 중국과 아세안 각국이 처음 만난 자리다. 중국과 아세안 양측은 ‘중-아세안 대화 관계 구축 25주년 기념 공동성명’과 ‘중-아세안 생산합작 공동성명’도 발표하는 등 남중국해 갈등 속에서도 협력 필요성이 높다는 점에 뜻을 같이했다. 리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양측의 관계는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이번 회의 개최국인 라오스를 방문하는 등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외교 공세를 강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6일 분냥 보라치트 라오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라오스에 투하한 사상 최대 폭격의 불발탄 제거를 위해 향후 3년간 9000만 달러(약 995억 원)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라오스 관계를 전면적 파트너십으로 격상하고 주기적으로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내년 퇴임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레임덕’이 결국 아세안 국가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의 남중국해 외교전은 기민하고, 한발 빨랐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올해 4월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 3개국을 찾아 이들로부터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과 아세안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일부 당사국 간 문제란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번 회의에서 발표된 남중국해 핫라인 설치와 충돌방지 행동강령 마련도 이미 지난달 몽골에서 열린 중-아세안 고위급 회담에서 관련 합의가 끝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돌발변수도 있었다. 필리핀 국방부가 7일 아세안 정상과 리커창 중국 총리의 회담이 열리기 몇 시간 전 남중국해에 출몰하는 중국어선 사진 10장을 아세안 정상회담 취재진에게 전격 배포한 것이다. 이를 보도한 로이터통신은 “국제 중재재판소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어민들은 해당 해역에서 어로 활동을 못 하고 있다”면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에 대한 중국의 의향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필리핀 국방부 관료의 발언을 함께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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