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사세요?’가 단순히 사는 곳만 묻는 질문이 아닌 요즘, ‘마을의 자존감’을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서촌 주민들로 이뤄진 ‘서촌주거공간연구회’ 회원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지도와 오래된 신문 등을 뒤지면서 마을을 탐구하고 마을 보존 운동도 함께 벌이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누하동의 한 커피숍에서 이들을 만나봤다.
서촌은 청와대 서편의 인왕산 기슭 아래 있는 동네. 종로구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체부동, 통인동, 누하동, 옥인동 등 15개 법정동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서도 중심 지역으로 역사가 가득한 동네지만 2011년경 5∼6층짜리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모임이 결성됐다. 도시계획 엔지니어인 장민수 씨(52)와 광고 촬영감독인 최문용 씨(51)가 모임을 공동으로 이끌고 회사원부터 한의사, 정치인, 작가 지망생 등 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인사동 삼청동 북촌 등이 상업화되면서 관광지로 변모한 선례를 봤잖아요. 서촌만큼은 ‘사람 사는 동네’,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모임을 만들었어요.”(장 대표)
“외국에선 역사의 작은 흔적이라도 의미를 부여해서 보존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동네의 자부심을 지역의 재력이나 아파트 브랜드에서 찾곤 하는 한국과 대비됐죠.”(최 대표)
이들은 지금도 옛 지도와 신문 등 각종 문헌을 뒤져 역사의 흔적을 찾고 있다.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이 무기를 은닉했다 발각되어 단원들이 체포된 장소, 헤이그특사인 이준 열사의 부인이 사망한 집, 1970년대 신문의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우량아가 살던 집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흔적을 찾아낸다.
특히 광복절에는 마을 초등학생들과 ‘항일 답사’를 벌인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직이 무기를 숨긴 장소 등을 찾아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소소하게 벌이는 식이다. 실패했거나 주목받지 못한 항일 운동을 찾아내서 마을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자는 취지다.
이들의 활동은 마을 탐구에 그치지 않는다. ‘마을의 내일은 내 일입니다’라는 모토로 마을에 사안이 있을 때에는 이를 벽보로 만들어 게릴라식으로 붙인다. 카피라이터인 주민이 문구를 만들고 캘리그래피(손으로 쓰는 문자)를 하는 주민이 썼다.
성과도 적지 않다. 천재시인 ‘이상의 집’이 낡았다며 이를 헐고 지하 2층, 지상 2층의 건물을 신축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세미나 등을 열어 가옥 보존을 이끌어냈다. 또 80여 년의 체부동 성결교회가 중국인 손에 넘어가려 했을 때에는 담당목사 등을 설득해 서울시가 매입하게 했다. 배화여고 과학관이 헐리고 외국인 학생 기숙사로 될 움직임이 있을 때에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 문화재 지정을 받아내는 데에 일조했다. 최근엔 예산 2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공영 지하 주차장 건설 움직임이 있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촌을 아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도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동네로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오래된 건축물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하잖아요. 새것을 무조건 동경하기보다는 오래되고 소중한 것에 가치를 두고 역사성을 찾아서 마을의 자존감을 찾으려 해요. 우리 아이들의 삶에 자양분이 되는 동네로 만들고 싶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