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8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0회째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등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4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대학교수 등 외부 전문가 4명씩이 참여해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교육]홍성대 상산고 이사장
‘수학의 정석’ 스타, 명문사학 일궈… “인재 양성 헌신할 것”
“인촌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도 2세 교육을 위해 사학을 세워 헌신한 나라의 어른입니다. 사학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동경한 분을 기리는 인촌상 수상자가 돼 영광입니다.”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79)은 기쁘다면서도 “후배들 격려하며 조용히 살지 않고 덥석 상을 받는 게 괜찮은지 조심스럽다”는 말을 네 번이나 했다. 수학 참고서 ‘수학의 정석’이 올해 8월 31일 발행 50주년을 맞는다는 것을 알고 연초부터 끈질기게 인터뷰를 하자고 했지만 계속 사양하던 그였다.
홍 이사장은 사학을 세워 35년 동안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해 왔다. 수학의 정석 수익금으로 1980년 학교법인 상산학원을, 다음 해 전북 전주에 상산고를 설립했다. 2003년 홍 이사장은 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상산고를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자립형사립고(현재는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했다.
그는 학생 모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과외 한 번 받지 않고 서로 도와주고 꿈을 키워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뿌듯했다. 전교생이 15명도 안 되는 울릉도 출신 학생, 북한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학생 등을 직접 발굴해 돈 걱정 없이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홍 이사장은 상산고뿐 아니라 다른 사학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1992∼99년 사단법인 한국사립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 회장, 2000년부터 올 3월까지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며 사학의 자주성을 신장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가 이토록 사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건 자신이 사학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중학교를 다녔던 홍 이사장은 “고향(전북 정읍)에 태인중이 생기지 않았다면 멀리 유학을 가야 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힘든 시기에 사학은 국가와 민족에 기여했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팔린 수학의 정석(4600만여 권)을 쌓아 올리면 에베레스트 산(8848m) 156개 높이다. 수차례 교육과정과 입시제도가 바뀌었지만 변함없이 사랑받는 건 개정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다. 학생들에게 도움 될 만한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쓴 ‘문제 카드’는 지금도 홍 이사장 서재에 빼곡하다.
홍 이사장은 “국경 없는 경쟁 시대의 국가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달렸다”며 “남은 생애도 교육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공적: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은 26세(1963년)에 수학 참고서 ‘수학의 정석’을 쓰며 중등교육에 뛰어들었다. 1966년 8월 출판된 수학의 정석은 첫해에만 3만5000여 권이 팔렸고, 1980∼90년대 초에는 매년 150만∼180만 권씩 나갔다. 5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4600만여 권이 팔렸다. 홍 이사장은 수학의 정석 수익금으로 1981년 상산고(전북 전주)를 세웠다. 탈북 학생 등 ‘숨은 진주’를 찾아내 상산고에서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특별지정 장학금을 기탁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을 후원하고 있다. 순수과학 연구자들을 위해 서울대에 1998년 상산수리과학관을 지어 기증했다. 1979년에는 고향인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명봉도서관을 세웠다.
●[언론·문화]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 언론·문화 평론-출판-편집 ‘78세 문학청년’… “文字문화 확산에 매진”
“영예로운 상을 수상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문자(文字) 문화를 확산시켜 나가는 데 평생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격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6일 서울 마포구의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난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78)은 인촌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대해 “큰 영광”이라고 밝혔다. 기자였던 그는 1970년 평론가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과 함께 계간 ‘문학과지성’을 창간했고, 1975년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해 출판인이자 비평가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던 것이 이후의 활동에 큰 힘이 됐다고 돌아봤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만든 신문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에 문화란 무엇인지, 글쓰기란 어떤 것인지, 사회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김 고문은 이후 평론가로 글을 쓰고,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문자’를 업으로 삼은 활동을 이어 왔다. 비평가로서의 그의 글쓰기는 난해하지 않고 평이하게 작품을 안내하는데, 이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 작품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평을 받는다. 올해 출간된 김원일 씨의 소설집 ‘비단길’의 해설을 쓰고, 산문집 ‘기억의 깊이’를 펴냈다. 그의 문자 활동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이름과 나란히 놓이는 문학과지성사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출판사다. 책등의 빨간 띠로 유명한 이 출판사는 문예지와 시집, 소설 단행본을 통해 국내 시인과 소설가들을 문학적으로 조명하고 알리는 데 기여해 왔다. 계간 ‘문학과지성’은 신군부 시절 폐간됐다가 1988년에야 ‘문학과사회’로 제호를 바꿔 복간되기도 했다.
김 고문은 “정치 없는 통치의 시대에 문학과 출판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행위를 했다”면서 “정치 없이 통치만 있던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가 펼쳤던 문화 사업과 맥락이 닿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고문은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문화예술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문화예술 지원의 정책과 수립에 예술인들이 참여해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무엇보다 관료적인 기구에서 민간 문화 조직으로 연착륙하고자 노력했다”며 겸손하게 소회를 밝혔다. ※공적: 1965년부터 75년까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1967년 ‘사상계’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비평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 김현 김치수 김주연과 함께 계간 ‘문학과지성’을 창간했고 1975년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했다. ‘한국문단사’ 등의 저서를 통해 문학이 문학 외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롭고 독자적인 위상과 품위를 유지하도록 추구하는 흐름을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최인훈 이청준 홍성원 오정희 임철우 한강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출간했다. 2005년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의 대표들로 구성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아 문화예술 행정가로도 공헌했다. 대산문학상, 한국출판학회상 등을 수상하고 국민훈장 모란장,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인문·사회]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 행정문화 연구 ‘한우물’… “사법-정치, 公先私後 실천해야”
“한국 사람들은 굶주리는데 미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잘살지?”
196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한 청년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오랜 관찰과 고민 끝에 찾아낸 답은 풍부한 자원이나 최첨단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삶의 양식, 즉 ‘문화’의 차이였다. 그는 문화론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국내 대표 행정학자인 백완기 고려대 행정학과 명예교수(80)가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든 계기다. 백 교수가 펴낸 ‘한국의 행정문화’는 행정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운명주의 가족주의 형식주의 등 한국 특유의 문화가 관료들의 행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 책이다. 입고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 하버드대 도서관에도 있다. 백 교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문제의식에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민주주의 문화론’이란 책에서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정착이 어려운 이유를 “자유와 권력 질서 등의 핵심가치가 본래의 모습대로 자리를 못 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직업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회의원과 환경미화원 공무원 등이 각자의 분야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면 그것이 곧 발전 동력이 된다는 게 백 교수의 설명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 정치 행정 엘리트 관료의 신뢰 추락에 “본래의 직업 가치를 잃고 사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2012년 ‘인촌 김성수의 삶―인간 자본의 표상’을 쓰기도 한 그는 “인촌은 공선사후(公先私後)를 실천한 대표적 인간”이라며 “단순한 업적이나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그의 삶 자체를 조명하고 싶었다”고 집필 이유를 설명했다.
현직 교수에서 물러난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높다. 팔순의 원로 학자이지만 침대 곁에 여전히 수십 권의 책과 영어 논문을 두고 수시로 읽는다. 지난해 말에는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을 연구해 학술지 ‘행정논총’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식지 않는 학구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좀 쉬라”며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백 교수는 “아직 할 일이 많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는 올해 말부터 ‘민주주의 문화론’과 ‘성경과 민주주의’ 등 자신이 펴낸 책의 영어 번역본을 준비할 예정이다. ※공적: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뒤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5년 국민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8년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2002년 정경대 행정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육과 학술 연구에 전념하며 공공부문의 인재와 후배를 육성하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한국행정학회장과 한국사회과학협의회장을 지내며 한국 행정 연구의 과학화와 사회과학 분야의 협동 연구를 이끌었다. 감사원 국민청구위원회 위원장,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시민의 권리 증진에도 기여했다. ‘한국의 행정문화’ 등 12권의 책을 펴냈다. 은퇴 후에 저술한 ‘인촌 김성수의 삶―인간 자본의 표상’은 수년에 걸친 집필과 퇴고로 완성한 역저로 평가받는다.
●[과학·기술]염한웅 포스텍 교수 ‘원자선’ 분야 세계 석학… “1nm이하 무오류 반도체 개발 목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어느 순간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깊이 오랫동안 연구해야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행을 좇지 않고 20년간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해 온 끈기에 대한 격려로 생각하겠습니다.”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자인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50)는 선 폭이 원자 1∼3개 크기로 극도의 가느다란 금속선, 일명 ‘원자선’의 물리적 성질을 규명하는 데 매진했다. 염 교수는 “1996년 일본 도쿄대에서 시작한 연구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최종 목표는 회로 선 폭이 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이면서도 오류가 전혀 없는 궁극의 초소형 반도체 ‘에러톨러런스(Error Tolerance)’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염 교수의 연구 성과는 현재는 과학계에서 불가능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5nm 이하 초소형 반도체 개발의 가능성을 열어 가고 있다. 그는 “현재 10nm급 반도체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약 5년 후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5nm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며 “만일 1nm급 반도체가 등장한다면 전 세계 반도체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염 교수는 세계 최초로 원자선 분야 연구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2003년부터 9년간 그가 이끈 ‘원자선원자막연구단’은 현재까지 종료된 물리학 분야 연구 사업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부터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13번째 연구단장에 선임돼 ‘저차원전자계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염 교수는 나이에 비해 우수한 연구 성과를 많이 냈다. 세계 주요 국가의 물리학 학술대회에서도 염 교수를 앞다퉈 초청할 만큼 세계적 영향력도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선 드물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이끌어 가는 ‘퍼스트 무버’형 물리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염 교수는 “영국 연구진이 차세대 신소재라는 ‘그래핀’ 연구로 2010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에 못잖은 기여를 했던 한국 연구진은 주목받지 못한 까닭이 ‘추격형’ 연구라는 한계 때문이다”라면서 “한 우물을 파는 자세로 고유 영역을 꾸준히 구축해야만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독창적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적: 염한웅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포스텍에서 석사 학위를, 일본 도호쿠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도쿄대 연구원을 거친 뒤 2000년엔 일본 방사광과학회의 젊은 과학자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연세대 물리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2003년부터 9년간 창의연구단 산하 원자선원자막연구단장을 지냈으며, 2015년 제15회 한국과학자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포스텍 교수 및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저차원전자계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원자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힌다. 총 170여 편의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인용 횟수는 총 3600여 회에 이른다. 물리학 분야 최고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투고한 논문만 총 30편에 달한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권예슬 동아사이언스 기자 yskwon@donga.com
● 제30회 인촌상 심사위원
∇교육 △위원장: 정진곤 민족사관고등학교장
△위원: 강상진 연세대 교수, 나승일 서울대 교수, 신현석 고려대 교수 ∇언론·문화 △위원장: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위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우찬제 서강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인문·사회 △위원장: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
△위원: 박찬욱 서울대 부총장,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과학·기술 △위원장: 김병윤 KAIST 창업원장
△위원: 김기문 포스텍 교수, 유명희 KIST 책임연구원,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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