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를 사랑으로 채운 나눔 천사들]2년전 세상떠난 부친 뜻 계승
60, 70대 아들-딸, 쌀 2000포대 전달… 얼굴 감춘채 기부 전통 이어가
6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구민운동장에 쌀 포대가 가득 실린 5t 트럭 두 대가 나타났다. 10kg짜리 쌀 2000포대(4600만 원 상당)가 실려 있었다.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 달라는 ‘얼굴 없는 천사’가 보낸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전해진 대구 수성구 ‘키다리 아저씨’의 대(代)를 이은 온정이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수성구에 따르면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딸(70)과 아들(68)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기증자들은 구민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방식이다. 아들은 지난달 중순 일찌감치 수성구 희망복지지원단 사무실을 찾아 추석 전에 쌀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이날 쌀을 전달했다.
이들 가족의 대를 이은 선행은 13년 전 시작됐다. 아버지 키다리 아저씨는 2003년 추석을 앞두고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이 편안하게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20kg들이 쌀 500포대를 수성구에 처음 기부했다. 이후 매년 잊지 않고 추석 전에 쌀을 전했다. 처음에는 ‘언론에 절대 공개하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사연만 알리자는 수성구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북한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는 성이 박 씨이고 6·25전쟁 때 월남해 부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대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하며 돈을 모았다. 장사를 하면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몇 차례 어려움을 겪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재기했다. 15년 전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면서 이웃 사랑 실천을 다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명절 때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의 아픔을 나누고자 했다. 북한에서 온 저소득 가정에 쌀을 나눠주라고 부탁했다.
1911년생인 그는 끝내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수성구가 여러 번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2005년에는 구청 간부가 주민을 대신해 인사를 전하려 찾아 갔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는 “나 찾아 올 시간에 다른 불우한 이웃을 돌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시 구청장이 그에게 감사패를 보내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부해 결국 감사의 편지로 대신했다. 구청 직원들은 미국 여류작가 진 웹스터가 1912년 발표한 아동문학 작품 이름을 따 그에게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였다.
박 씨는 201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자녀가 기부를 이어 가고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아들은 가업을 이었으며, 딸은 대학 교수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이들 가족이 지금까지 기증한 쌀은 2만6000포대(6억 원 상당)에 이른다.
수성구는 이번에 기증받은 쌀을 동 주민센터와 사회복지관, 경로당 이북5도민 단체 등 77곳에 골고루 나눠 줘 키다리 아저씨 가족의 온정을 대신 전달했다. 정계순 수성구 복지자원관리팀장은 “아들도 아버지처럼 평범한 이웃집 어르신 같은 모습이었다”며 “이들의 조용한 선행이 희망 나눔의 대명사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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