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은 포장길로 들어섰지만 몸은 천근만근이다. 종아리와 무릎의 통증으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고통스러웠다. 허벅지는 근육이 뒤틀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때 길가에 늘어선 마을 주민과 자원봉사자의 응원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쥐어짜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힘을 만들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결승선을 마침내 넘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울트라 트레일 러닝(Trail-running) 대회 가운데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의 170km(UTMB), 101km(CCC), 119km(TDS), 290km(PTL), 55km(OCC) 등 5개 종목이 지난달 21일부터 28일까지 프랑스 샤모니 등지에서 열렸다. 87개국 7900여 명이 참가했다. 트레일 러닝 대회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기자는 CCC에 도전했다. 제한 시간(26시간 45분) 이내인 26시간 27분에 완주했다. 포장길을 달리는 일반 마라톤과 달리 산과 들 계곡 사막 등 비포장 길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은 유럽에서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트레일 러닝에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이번 대회에 30여 명이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완주는 13명에 불과했다. 트레일 러너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UTMB는 유럽의 지붕인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703m) 주변 산악지대를 걷고 달리는 코스로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인 ‘투르 드 몽블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 샤모니, 이탈리아 쿠르마유르, 스위스 샹페라크 등 3개국 19개 코뮌(기초자치단체)을 지난다. ‘하얀 산’을 뜻하는 몽블랑과 주변 산악지대 만년설, 고산 초원지대 풍광 등이 일품이다.
현실이 된 꿈의 레이스
지난달 26일 오전 9시 이탈리아 쿠르마유르 CCC 출발선. 신호와 함께 2129명의 선수들이 힘차게 발을 내디디며 대장정에 돌입했다. 주민들과 선수 가족 등이 목소리를 높여 완주를 응원했다. CCC 종목은 최저 해발 1035m에서 최고 2537m 사이를 오르내린다. 누적 고도 6092m를 극복해야 한다. 누적 고도와 거리만으로 따지면 한라산 성판악 탐방코스로 정상까지를 5번가량 왕복해야 하는 난도이다.
레이스 초반에는 끊임없는 오르막이다. 질경이풀과 벌노랑이 마가목 등 한국에서도 익히 보아 오던 식물이 반가웠다.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과 수목한계선(해발 1800∼2000m)을 지나자 본격적인 초원지대가 펼쳐졌다. 발아래로는 출발지 마을 전경이 아득하게 다가왔고 눈앞에는 뾰족뾰족한 산릉에 만년설이 내려앉아 있다. 초원지대에서는 보랏빛의 솔체꽃과 당잔대, 순백의 색깔이 선명한 구절초와 물매화, 노란 마타리와 분홍바늘꽃이 지천이었다. 초원지대를 힘겹게 넘으니 첫 번째 관문이자 이번 레이스 최고점인 해발 2571m ‘테트드라트롱슈’에 도착했다.
레이스 코스는 현지인이나 목동들이 소나 양떼를 몰고 다녀 다지고 다져진 흙길이다. 처음에는 인공적인 계단이 없어 다소 수월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고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하천, 계곡을 지나면서 로마 병사들이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행군했던 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빙하 물은 주민이나 목동 가축의 식수원이었고 선수들의 갈증을 달래 준 물이기도 했다.
숨 막히는 고통
오르막에 이어 내리막에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체크포인트(CP·식수, 음식물을 제공하며 통과 시간 등을 점검하는 곳)에서 확인하는 제한 시간 통과를 위해서는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27km 지점인 ‘아르누바’에서는 간단한 요기가 가능했다. 음료, 과일 등으로 몸을 재정비하고 CP를 나서자마자 오르막이다.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에 기가 질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쉬는 시간이 잦아졌다. 초원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눈에 보이는 능선에만 올라서면 정상일 듯한데 또다시 언덕이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라는 후회가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 즈음 완주 후 찾아오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전리품’으로 얻어야 한다는 각오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32km 지점 ‘그랑콜페레’(2537m)에 올랐다. 한쪽 발로는 이탈리아 땅을, 다른 발로는 스위스 땅을 밟았다. 국경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스위스로 들어서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목동이 모는 양떼, 오두막 산장 ‘샬레’ 등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풍경에 취할 여유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옮겼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풀리’에서 머리에 랜턴을 장착했다. 랜턴 불빛과 불빛에 비친 야광 마크에 의지하고 길을 찾았다. 비교적 큰 마을인 ‘샹페라크’를 지나면서 밤은 깊어졌다. 절반가량 레이스를 펼쳤는데 앞으로도 남은 봉우리가 3개나 됐다.
완주의 기쁨
밤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북두칠성이 선명했다. 거대한 산봉우리 위로 별이 무수히 쏟아졌다. 산 중턱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선수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마치 별을 따러 가는 행렬처럼 보였다. 낭만적인 생각도 잠시. 전반의 흙길과는 달리 자갈과 바위인 너덜지대(돌이 많이 깔려 있는 산비탈)가 많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기온이 떨어지며 한기도 밀려왔다. 스위스를 지나 프랑스로 접어들었지만 국경을 지나는 걸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동이 트면서 주위를 밝혔다. 레이스가 제한 시간을 넘기면 이번 도전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끝까지 체력 안배를 하면 시간 제한에 걸릴 듯하고, 속도를 내면 체력이 견뎌 주지 못할 듯했다.
속도와 체력을 조합하면서 마지막 고비인 돌산을 올랐다.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지 식수를 미리 챙기지 못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목이 타 들어가면서 체력도 급속히 떨어졌다. 때마침 바위에 붙어 자라는 들쭉나무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빙하 하천이 나올 때까지 열매 물기로 겨우 목을 축였다. 스키장 전망대를 지날 때 남은 거리는 내리막 8km. 완주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 달릴 기운이 없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며 결국 샤모니 광장의 결승선을 밟았다. 레이스를 마친 몸과 마음이 너무나 대견했다. CCC 완주자는 참가자의 65%인 1386명이었다. 나머지 743명은 중도 포기하거나 제한 시간을 넘겼다.
짜임새 있는 대회 운영
이번 UTMB 5개 종목 참가자는 프랑스인이 37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일본 290여 명, 중국(홍콩 포함) 280여 명이 참가했다. 완주 비율은 약 65%. 이 대회 참가를 위해서는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에서 인증한 점수가 필요하다. 역대 참가자 중 남성은 87%, 여성은 13% 정도다. 평균연령은 40대 초반이다.
UTMB는 2003년 첫 대회 당시 722명이 참가해 67명이 완주했다. 트레일 러닝 인기가 폭발하면서 참가자가 급증했다. 2006년 CCC에 이어 2009년 TDS, 2011년 PTL, 2014년 OCC가 각각 탄생했다. 2008년 대회 접수는 8, 9분 만에 모두 마감될 정도로 성황이었다. 대회조직위원회는 2009년부터 트레일 러닝 경험이 있는 선수를 대상으로 사전 접수를 한 뒤 추첨을 통해 참가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트레일 러닝 선구자인 제주 출신 안병식 씨가 2009년 처음으로 참가해 완주했다.
참가 선수들은 방수 재킷과 비상 음식, 방한 장비, 응급의료품, 호루라기, 생존담요, 헤드랜턴, 식수 등을 담은 배낭을 준비해야 한다. 2010년과 2011년, 2012년에 폭우와 낙석 등 급격한 기상 변화로 대회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서 안전 규정이 더욱 강화됐다. 필수 품목을 갖추지 못하면 감점을 받거나 실격 처리된다. 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다. 일회용 물품을 쓰지 못하고 동식물에 대한 배려도 기본이다.
대회 수익금과 기부금은 네팔과 인도 멕시코 등지 보육원과 소아병원 등에 보내진다. 대회 레이스 과정은 웹TV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참가 선수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등 첨단 기술도 선보이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