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덟 살 위의 여자를 ‘쌤’(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시각장애 유도 선수인 자신의 말을 통역해 주는 여자가 무척이나 멋있어 보였다. 여자는 남자를 ‘최광근 선수’라고 불렀다. 작은 도움에도 “감사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이는 남자가 참 예의바르다고 생각했다.
남녀는 2012년 런던 패럴림픽에서 처음 만났다. 남자는 시각장애 유도 100kg급에서 우승했고 여자는 대한장애인체육회의 국제 업무 담당 직원으로 현지에서 선수들을 지원했다.
남자 최광근(29·수원시청)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여자 권혜진 씨(37·장애인체육회 대리)를 계속 만날 방법을 궁리하다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권 씨는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나이 차가 워낙 커 남자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권 씨는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한 재원이다.
권 씨는 2013년 이천장애인종합훈련원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그곳에서 대표팀 합숙훈련을 하던 최광근과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늘었다. 권 씨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고 둘은 그해 말부터 연인 사이가 됐다.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주위에서는 장애와 나이 차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권 씨는 “예의 바르고 꿈이 많다. 가족의 밥그릇은 확실히 챙길 사람”이라며 부모님과 주변을 설득했다.
2015년 1월 둘은 결혼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결혼반지도 없었다. 권 씨는 “결혼을 앞두고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를 치르면서 둘 다 바빴다. 대회가 끝나고 나서는 내가 대학원(서울대) 석사과정을 마치느라 결혼식을 제대로 준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짬을 내 결혼반지 몇 개를 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일단 미뤘다. 신혼여행도 남편이 출전한 헝가리 국제대회에 따라갔다가 경기가 끝난 뒤 며칠 더 머무는 걸로 대신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 뒤 남편이 결혼반지를 맞추지 못한 것을 마음에 걸려 할 때마다 권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왕 늦은 거 리우에서 금메달을 따면 그때 프러포즈와 같이 해줘. 은메달 따면 평생 은반지 끼고 살 거니까 열심히 훈련해. 약속할 수 있지?”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 최광근은 11일 열린 100kg급 결승에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안방 팬들의 응원 속에 출전한 안토니우 테나리우(브라질)를 1분 31초 만에 발뒤축후리기 한판승으로 꺾었다. 한국 유도의 패럴림픽 첫 2연패였다.
매트에서 내려와 보조원의 팔을 잡고 관중석으로 향한 최광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권 씨를 와락 껴안았다. 시상식까지 마친 뒤 부부는 취재진 앞에 섰다. 남편은 “내가 많이 부족한데 결혼해 줘서 고맙다”라며 아내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줬다. 펑펑 울던 아내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늦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금메달 프러포즈’였다. 권 씨는 “남편이 정말 자랑스럽다. 아들에게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운전을 내가 도맡아 해야 된다는 것을 빼놓고는 살면서 불편한 점은 못 느꼈다. 한국에 돌아가면 결혼반지를 골라봐야겠다”며 웃었다. 권 씨는 이번 대회에서 상황실을 지키고 있다.
최광근은 아들의 살을 빼려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5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다. 강릉 주문진고교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그해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3학년 선배와 연습 경기를 하다 왼쪽 눈을 크게 다쳤다.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어머니 김숙희 씨(52)는 유도를 시킨 것을 후회했다. ‘망막 박리’ 판정을 받은 그에게 의사는 유도를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만 최광근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울면서도 다시 도복을 입었다. 장애인 비장애인 대회에 모두 출전하기 시작한 고교 3학년 때는 비장애인 대회에서도 우승을 했고 한국체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왼쪽 눈이 나빠지자 오른쪽 눈도 점차 나빠졌다. 그러나 시각장애 유도를 시작한 뒤로는 곧바로 국내 최강자가 됐다.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도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최광근은 런던 패럴림픽에서 우승한 뒤 “엄마, 빨리 나아. 나 금메달 땄어”라며 큰 소리로 우승 소감을 밝혔다. 어려운 형편에 혼자서 어렵게 아들을 키운 김 씨는 당시 림프샘결핵으로 투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승 소감으로 아내만 찾은 것에 대해 서운하지 않느냐고 묻자 국내에서 금메달 소식을 들은 김 씨는 “아들이란 결혼하면 다 그런 것 아니냐”면서 “우리 며느리가 바쁜데도 나를 너무 잘 챙겨준다. 리우에서도 매일 전화로 광근이의 일정을 ‘보고’했다. 이제는 몸도 아프지 않고 행복하다. 광근이가 유도를 그만두지 않기를 잘했다”며 웃었다.
패럴림픽 금메달 정부 포상금은 6000만 원이다. 여기에 최광근은 런던 대회 우승으로 경기력 향상 연구연금 상한선 100만 원을 이미 채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일시불로 6700만 원을 받게 된다. 소속 팀, 연맹, 지자체로부터 나오는 포상금까지 하면 두 번째 금메달로 얻는 액수는 1억5000만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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