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장선희]뛰는 팬덤 위에 나는 상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12일 03시 00분


팬들이 돈을 갹출해 아이돌의 앨범 발매나 데뷔를 돕는 웹사이트.4개 언어로 서비스하고 있다.화면캡처
팬들이 돈을 갹출해 아이돌의 앨범 발매나 데뷔를 돕는 웹사이트.4개 언어로 서비스하고 있다.화면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장선희 문화부 기자
얼마 전 일이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진 늘상 보는 풍경. 그런데 들려오는 대화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광고 앱을 막 깔아. 그러면 돈처럼 쓸 수 있는 걸 주거든. 급하면 돈 주고 사든가. 난 저번에도 5만 원인가 했어.”

여학생들이 뭔가 험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닐까 싶어 유심히 들여다봤다. 사정은 이랬다. 그들은 아이돌의 팬이었다. 어떤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아이돌을 향한 나의 ‘마음’을 적립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은 1000원부터 돈 주고 살 수 있는데 돈이 없어도 방법은 있다. 앱 제작사의 협력업체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하면 건당 얼마씩 모을 수 있다는 것. 이 돈은 아이돌의 생일이나 데뷔기념일에 각종 이벤트를 위해 쓰인다. 해당 앱에서는 인기 아이돌의 생일이 며칠 남았는지, 목표액은 얼마고 참여한 팬은 몇 명인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순간 출근길에 봤던 지하철 역사 안 대형 광고판이 스쳤다. ‘○○야 생일 축하해, 늘 지금처럼 웃길’ ‘○○의 데뷔 3주년을 기념하며’…. 연예인들은 지하철도 잘 안 탈 텐데 여기다 뭐 하러 광고를 할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다녔는데, 실상은 그런 소년 소녀들의 시간과 돈이 버무려진 결과였던 것이다.

최근 ‘글로벌 한류 크라우드펀딩’을 표방하며 탄생한 어느 웹사이트에서는 더욱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선 아이돌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팬들이 분주하게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한 신인 여자 아이돌은 ‘싱글앨범 발매 프로젝트’ 모금액 목표치로 1000만 원을 잡았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1025만 원을 모았다. 팬들은 최소액인 1000원을 내면 명예제작자 증서와 감사인사 영상을 받고, 가장 큰 액수인 100만 원을 내면 추가로 연예인의 손 편지, 식사 팬미팅 초대권 1장을 받을 수 있다. 단, 연예인이 해외에 있으면 화상통화로 대체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애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 모두 겉포장은 그럴싸하다. ‘올바른 팬 서포트 문화를 선도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표방하고 ‘한국의 아이돌(가수), 배우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총망라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지향한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돈’이다. 합리적인 듯하면서도 어쩐지 ‘호갱’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옆자리에서 열심히 ‘마음’을 적립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데 문득 1997년이 떠올랐다. 나 역시 지금은 데뷔 20주년을 맞은 아이돌의 팬이었다. 그땐 ‘빠순이’로 불릴지언정 팬 활동은 꽤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을 향한 마음은 굳이 표현해야 할 이유도 몰랐지만, 큰 마음먹고 표현해봤자 공개방송 따라가기나 공연 티켓을 사는 정도였다.

최근 들어 아이돌 팬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일고 있다. 아이돌을 향한 팬심을 소재로 한 소설책이 문학상을 받고, 여기저기서 뒤늦게나마 빠순이 옹호론을 펼친다. 비뚤어진 10대들의 일탈쯤으로 폄하되던 팬 문화는 이제 대중문화의 어엿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제3의 문화 권력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이렇듯 팬이 ‘빠순이’를 지나 ‘팬덤’이라는 우아한 단어로 격상한 시대, 그 팬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현금화하기 위한 노력 역시 갈수록 교묘해진다. ‘팬 크라우드펀딩’ ‘팬 서포트’처럼 어쩐지 있어 보이고 그럴싸한 말들이 더 공허하고 씁쓸하게 들리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
#아이돌#팬덤#상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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