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라파엘전파형제회를 결성한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화가는 6명의 동료와 단체를 만들어 미술의 진실에 함께 다가가고자 했어요. 그 방법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장엄한 양식을 완성한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 이전 시대 미술에 주목했지요.
‘미술은 대가 흉내내기가 아니라 미술가 개인의 감각과 관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화가는 라파엘전파에 끝까지 남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예술적 신념만은 ‘비눗방울’을 그린 말년까지 유지했지요. 화가는 이 그림 때문에 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비누 광고에 사용했거든요.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로 벌어진 일에 비난이 일었어요. 시장의 상술에 휘둘려 예술의 순수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거셌지요.
놀이하는 아이들이 그림에 등장한 것은 16세기 초였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졌지요. 당시 놀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동기 놀이에 대한 생각만은 예외였어요. 놀이가 바람직한 가치관 형성과 건강한 신체 단련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지요. 비눗방울 놀이는 이때부터 반복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림 중앙 소년 양옆으로 두 개의 화분이 놓여 있습니다. 자라나는 식물이 담긴 아이 왼편 화분이 삶을 상징합니다. 깨져 나뒹구는 오른편 화분이 죽음을 뜻합니다. 찬란하고 쓸쓸한 삶과 죽음 사이에 비눗방울이 떠 있군요. 황홀함을 선사한 후 사라지는 비누거품은 찬란하고도 헛헛한 인생을 의미했지요. 그림 속 금발머리 소년은 화가의 다섯 살 손자였다지요. 손자를 눈앞에 두고 그리는 노년 화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비누거품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벅차고 아쉽지 않았을까요.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시민들이 기증한 유물로 ‘기억 속 집’을 재구성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더군요. 세월을 다부지게 견딘 라디오와 손때 묻은 정갈한 재봉틀이 전시된 진열장 앞의 관객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전시장 곳곳에서 잊고 지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어요. 신기한 라디오를 들으며, 귀한 재봉틀을 돌리며 소란스럽고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목소리도 이어졌지요. 오래된 사물들의 고요한 세계에 많은 것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대기를 가볍게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덧없고, 아름다운 존재와 시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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