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옛 장사들, 다단계-격투기-막노동 전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18일 03시 00분


[커버스토리/ 씨름, 부활의 샅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씨름은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경제 한파(寒波)가 불어닥친 1990년대 후반부터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씨름은 아직도 명절마다 중계방송 시청률 5% 안팎을 유지하며 ‘국민 스포츠’로서의 명맥을 잇고 있다. 화려했던 영광을 기억하는 장사들은 “씨름은 그 자체로 민족의 혼을 담고 있는 역사”라며 씨름의 부활을 염원했다.
○ 잇단 선수 이탈과 경제위기로 ‘흔들’

우리 씨름의 역사는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5세기경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벽화에는 고구려인과 매부리코의 외국인이 씨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왕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 놀이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말살 정책도 이겨내고 명맥을 유지했다.

광복 후에는 고우주, 김성률 등 민속씨름의 원조 격인 장사들이 전국을 휩쓸었다. 현대와 같은 형태의 민속씨름이 본격적인 인기를 끈 것은 1980년대부터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프로야구에 이어 이듬해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출범시켰다. 마침 컬러 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를 두고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정권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국민들은 씨름장과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초창기 프로씨름 중계방송은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나들었다. 특히 1988년 이만기와 이준희가 맞붙은 제6회 천하장사대회 결승전은 68%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렸다. 저녁 경기가 길어질 때마다 아나운서는 “9시 뉴스는 중계방송이 끝난 다음에 보내 드리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곤 했다. 기업들도 앞다퉈 씨름팀을 창설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프로팀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씨름은 위기를 맞았다. 강한 개성과 화려한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밀려나거나 다른 종목으로 옮기면서 별 재미 없는 체급별 경기로 전락했다. 결정타는 2004년 말 간신히 유지되던 프로씨름팀 3개 중 LG투자증권씨름단이 해체를 선언한 것이었다. 간판 선수였던 최홍만은 해체 발표 직후 이종격투기 진출을 선언하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프로씨름이 고사 위기에 처하자 김영현 등 선수 25명은 이듬해 장충체육관 앞에서 상복을 입고 “한국씨름연맹 집행부 퇴진”을 외치며 ‘씨름 장례식’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하지만 신창건설마저 무너지면서 프로씨름 대회를 주관해온 한국씨름연맹은 사실상 해체됐다. 대한씨름협회 역시 밥그릇 싸움에 바빠 종목 진흥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유일한 프로팀인 현대코끼리씨름단마저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조선 산업의 위기 속에 팀을 운영하던 현대삼호중공업은 결국 올해 말 기존 팀을 해단하고 새로 창단될 전남 영암군청에 선수들을 전원 인계하기로 결정했다.
○ 화려한 모래판 뒤로하고

과거 모래판을 주름잡던 장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씨름이 쇠락한 뒤에도 씨름판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36세 최고령 천하장사 기록을 가진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은 친정인 현대코끼리씨름단의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후배들을 양성해 왔다. ‘슈퍼두꺼비’로 불렸던 김정필은 지난해까지 대구씨름협회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삶이나 ‘인생 2막’을 여는 데 성공한 일부를 빼면 대부분 생업을 고민하며 ‘투잡’을 뛰어야 한다. 특히 슈퍼스타급 인기를 끌었던 ‘3이(李)’인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의 은퇴 후 모습은 제각각이다.

천하장사 10차례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이만기는 인제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총선에도 출마하는 등 정계 진출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탁월한 기술, 수려한 외모로 씨름판의 관객들을 열광시켰던 그는 강단에 서는 것 외에 TV 예능 프로그램 단골 섭외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 기중기’로 이름을 떨친 이봉걸은 부상으로 은퇴한 뒤 치킨점, 의류판매업 등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해 다단계 판매업까지 했다. 2009년엔 에너라이프 씨름단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9개월 만에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현재는 대전씨름협회장을 맡고 있다.

이준희는 ‘모래판의 신사’로 불렸지만 2012년 노인들을 상대로 한 건강식품 사기범죄에 연루돼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그는 현재 염화칼슘 납품 사업을 하며 통합씨름협회 경기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3李 트로이카’는 14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추석장사씨름대회 개막식에 앞서 팬 사인회를 열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 엇갈린 ‘외도’의 결말

씨름 쇠퇴와 함께 아예 다른 길을 선택한 선수도 많다. ‘원조 골리앗’ 김영현은 2007년 종합격투기의 일종인 K1으로 전향했으나 네 차례 경기에서 2승 2패의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 뒤 씨름이나 격투기계와 연락을 끊고 있다. 엔터테이너 기질이 강했던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은 24일 종합격투기 경기에 출전하며 8년 만에 국내 격투기 무대에 복귀할 예정이다.

역대 최다승, 총상금 1위 등 화려한 기록을 보유한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 용인대 교수 역시 2006년 종합격투기에 진출했다. 그는 “씨름판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던 함성과 화려한 조명이 너무나 그리웠다”고 말했지만 정작 성적은 좋지 않았다. 결국 2년 만에 씨름으로 복귀했다. 선수 시절에도 틈틈이 공부하며 석·박사 학위를 딴 그는 2011년 공식 은퇴 후 꾸준히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완전히 전직한 장사들도 있다. ‘씨름판의 악동’ 강호동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 성공적인 사례는 많지 않다. 17세에 최연소 천하장사에 오른 ‘소년장사’ 백승일은 은퇴 후 K1 등 각종 스포츠계의 선수 제의를 뿌리치고 2006년 데뷔한 10년 차 트로트 가수이지만 아직 무명에 가깝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경기 고양시에서 음식점 ‘천하장사 백승일 돈카츠’도 운영하고 있다. 올해 4월 새 앨범 ‘전통시장’을 발표한 그는 “전국 순회 홍보 때문에 바쁘다”면서도 “기회가 된다면 씨름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람바다’ 박광덕은 강호동의 뒤를 이어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식당, 라이브카페 등을 전전하던 그는 현재 인천 부평구, 서울 강서구 등 전국에 ‘박광덕의 천하장사 족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학구적인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 연간 3차례 열리던 천하장사대회가 한 차례로 줄어든 직후인 1995, 96년 연속 우승한 ‘들소’ 김경수는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이후엔 마케팅 등 기업체에 몸담았고 2012년에는 대학원에서 3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회사를 다녀 보니 드라마 ‘미생’에 그렇게 공감이 갈 수가 없었다”던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며 올해 하반기에는 공공분야의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털보장사’로 사랑받은 이승삼은 2008년 씨름선수의 부상과 회복에 관한 논문으로 모교인 경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현역 시절 끝내 천하장사에 오르지 못한 이승삼은 경남대, 마산씨름단, 창원시청 감독으로 후배들을 키우다 2014년 정경진(창원시청)을 결국 천하장사로 만들고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홍정수 hong@donga.com·차길호 기자


#씨름#천하장사#이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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