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성규]우리 시대의 자화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22일 03시 00분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기사에 달린 댓글에 연연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내용의 일부 단면에만 연연하는 댓글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른 언론사 기사들의 댓글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는 편이다. 특히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일반 시민의 시선을 체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댓글로부터 ‘김영란법 시행은 사회적 요구’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읽었다. 이른바 권력기관 내부에서 벌어진 비위 실태가 도미노처럼 불거지는 현 시점에서는 기자 역시 한 시민의 시선으로 김영란법 시행의 필요성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레인지로버 부장판사’로 불리는 김수천 부장판사가 결국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됐다. 현직 부장판사가 법정의 가장 높은 단상 위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앉게 된 것이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게서 5만 원권 다발로 1억5000만 원이 담긴 쇼핑백까지 받았다고 한다.

현직 부장판사의 뇌물 수수 의혹은 정 전 대표 명의의 레인지로버 차량이 김 부장판사 측으로 넘어간 사실이 밝혀지며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제의 레인지로버 차량 인수대금 5000만 원 역시 정 전 대표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었다. 의혹이 불거진 지 석 달 넘게 검찰 수사만 지켜보던 법원의 태도가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김 부장판사는 휴직계를 냈고, 법원은 받아들였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까지 내놨다.

검찰에 대한 개혁 요구도 만만치 않다. 홍만표 전 검사장의 법조 비리 사건, 진경준 전 검사장의 주식 뇌물 사건에 이어 스폰서 부장검사 의혹까지 겹쳤다. 현직 부장검사가 사업가 동창의 돈으로 향응을 즐기고, 유흥업소 여종업원에게 차와 집까지 마련해 줬단다. 게다가 스폰서와 벌이는 장외 폭로전도 꼴불견이다.

레인지로버 부장판사 사건과 스폰서 부장검사 사건이 주는 충격은 이전 법조 비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성역과 같은 재판과 수사라는 영역을 매개로 뇌물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비리 실태를 법조계나 공직자 비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언론인 역시 도마에 올랐다. 최근 조선일보 주필을 둘러싼 호화 접대 의혹이 기폭제가 됐다.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는 억울한 면이 많지만, 언론계 역시 감시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 됐다.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고 외쳐 봐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선 초록동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꼭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김영란법 시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들에 달리는 험악한 댓글들을 보면 이런 시선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한 수사기관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너무 고맙다”고 말한다. 김영란법을 근거로 공직자나 관계 기업 수사에 필요한 강제 수사 권한이 그만큼 늘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경찰-검찰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거론될 정도다. 공직자,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 등이 스스로 더 자정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다.

실적 올리기를 벼르고 있는 수사기관들 앞에서 잠재적 수사 대상으로 거론될지라도 감내해야 할 일이다. 공직이나 언론이나 모두 막중한 임무와 엄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회적 기대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다.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의 현직 부장판사가 재판 관여 청탁 대가로 억대 금품을 받고, ‘정의의 칼’을 자부하는 검찰의 현직 부장검사가 스폰서에게 휘둘리는 실태, 여기에 ‘감시의 눈’을 자부했던 신문사 주필까지 호화 접대를 받고 다닌 마당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회의 높은 기대 수준을 무시할 수 없다.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hot@donga.com
#김영란법#레인지로버 부장판사#김수천#검찰 개혁#스폰서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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